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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나에 지나간시절

프로야구 LG 트윈스 2001년 시즌

by mostheri 2023.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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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2001년 프로 LG트윈스 흙역사 를 쓰기 시작한 해 가 아닌가

하는 생각 이 듭니다 

2군신임감독으로 김성근 감독이 온후 2002년 1군 감독 으로 취임하여 쉽지 않은 

상태에서 한국 시리즈 까지 갔으나 6차전 이승엽 동점홈런과 마해영 의 끝내기 홈런

으로 준우승에 멈추었지만 LG 트윈스 에서 다음해에 김성근 감독과 제계약을 하지 

않은후 긴시간동안 플레이 오프 에도 진출 하지 못하는 LG흙역사의 시작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예전 이나 지금이나  LG프런트 가 참 한심하다는고 생각하는게 

인력관리를 참 못합니다 

한마디로 보는 눈이 없어요 LG트윈스 에서 주전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있던 선수들을 

방출하면 다른팀에 가서 펄펄 나르고 2001년 18억을 주고 영입한 홍연우 같은 경우

지금 생각 하면 먹튀선수 왜 이렇게 보는 눈들이 없는지 프런트나 구단 고위 관계자나 

참 LG팬들의 50% 정도만의 열정이 있다면 이런행동들을 하지않으리라 생각 됩니다 

2001년 LG트윈스 상대전적

♥ 2001년 LG트윈스 스토브 리그 

2군 신임감독에 김성근 전 삼성 2군 감독을 선임했다.

그동안 2군 감독이었던 김인식 코치는 1군 수석코치로 자리를 옮겼으며 이순철 전 삼성 코치가 수비코치로 합류했다.

최정기 구리챔피언스파크 관리소장이 1군 배터리코치가 됐고 김영직 코치와 김용국 코치는 2군 코치로 자리를 바꿨다. 2000년 11월 16일 김용수가 16년의 프로경력을 마치고 은퇴를 발표했다. 

김선진 역시 은퇴했다.

SK에서 방출된 심성보와 강민규를 영입했다.

해태 내야수 홍현우를 4년 18억 원에 영입했다. 최익성이 보상선수로 해태로 이적했다.

데니 해리거와는 재계약(연봉 10만달러, 사이닝보너스 10만달러)을 맺고, 찰스 스미스와의 재계약은 포기했다. 

외국인 선수 보유 한도가 2명에서 3명으로 늘어난 가운데 한화에서 재계약이 불발된 

댄 로마이어(연봉 16만달러, 사이닝보너스 4만달러)와

좌완 투수 에프레인 발데스(계약금 4만달러, 연봉 10만달러, 옵션 6만달러)를 영입했다.

 

★프로야구 LG 트윈스 2001년 시즌 

해태에서 KIA로 바뀐 타이거즈를 상대로 4년만에 상대전적에서 우세를 거뒀고,

롯데를 상대로는 5년 연속 우세를 이어갔다.

디펜딩 챔피언 현대를 상대로도 9승2무8패로 3년만에 우세를 거뒀다.

그러나 나머지 네 팀과의 상대전적에서 열세를 기록했다.

삼성을 상대로 1996년부터 6년 연속 우세에 실패하고 1999년을 빼고 열세를 허용했다.

한때 삼성에 8전 전패까지 갔으나 그나마 후반기에는 팽팽한 흐름으로 가면서 체면치레했다.

2000시즌 507 대참사와 플레이오프에서 굴욕을 맛봤지만 정규시즌 상대전적은 10승9패로

근소우세였던 두산전은 6승1무12패에 그치며 1999년에 이어 2년만에 절대열세의 굴욕을 당했다.

지난해 오상민과 이승호에게 크게 고전하며 최약체 SK에 11승 8패에 그쳤던 LG는 이번에는

개막전 2연전 패배를 포함해 8승1무10패로 열세를 당했다.

이는 SK의 창단 이후 타팀과의 첫 한 시즌 상대전적 우세였다.

또한 순위경쟁팀이었던 한화전에선 4월에만 6전 전패를 당한 것이 치명타로 작용하며

6승3무10패로 3년만에 열세를 당했다.

투수 3관왕 신윤호는 청주에서 타자로 나온 송진우에게 끝내기 안타를 맞기도 했다.

 

시즌 막판까지 포스트 시즌 진출을 위한 치열한 경쟁 속에서 LG는 초반 극심한 부진을

극복하지 못하고 간신히 창단 후 첫 최하위를 면한 채 페넌트레이스 6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물론 0.473의 낮은 승률로 4위를 기록한 한화와의 승차는 1경기차에 불과하기는 했다.

2000 시즌 종료 후 LG는 FA 최대어 홍현우와 한화 출신의 거포 댄 로마이어 선수를 영입해 '준마재현' 타선을 구축했다.

외국인 왼손 투수 발데스를 영입하며 전력을 정비해 나갔다.

선수협 파동으로 여느해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았던 동계훈련에 대한 우려도 있었으나

대내외적으로 우승후보 내지는 최소한 4강권이라는 기대를 갖고 시즌에 들어갔다.

그러나 최약체로 평가되던 SK에게 개막전 2연패의 충격을 당하고 연패의 부진에 빠졌다.

'노송' 김용수가 은퇴한 가운데 에이스 해리거를 포함해 발데스까지 기대를 모았던

외국인 투수들이 부진을 보였고 최향남과 최원호가 부상으로 개점휴업했으며,

기존 선수들 또한 자신감 없는 피칭으로 마운드가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다.

타자 또한 마찬가지여서 찬스에 한방을 기대했던 선수들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팀배팅도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초반부터 연패를 거듭한 LG는 급기야 최하위로 추락해 김성근 2군 감독을

1군 수석코치로임명하는 등 긴급 처방을 취했으나 선수단은 부상과 슬럼프의

악재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고결국 이광은 감독은 9승 1무 25패라는 초라한 성적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했다.

5월 16일 김성근 감독대행의 취임으로 원점에서 다시 시작한 LG는 혜성같이 등장한

'신데렐라' 신윤호를 마무리투수로 낙점하며 점차 마운드의 안정을 찾아가고 타선에서도

부상선수들을 대신해 백업요원으로 출전한 최동수와 권용관 등 젊은 선수들이 제몫을

다하는 활약으로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이병규, 김재현 등 중견 선수들의 타격도 다시 살아나고 승부에 대한 집중력도 점차 향상되었다.

극심한 연패의 늪에서 벗어나 5월 후반부터 꾸준히 승수를 올리며 7월말에는 5위까지

올라가는 등 후반기 치열한 4강 다툼에 합류했다.

하지만 막판 뒷심을 끝내 발휘하지 못하고 6위라는 아쉬운 성적으로 2001 시즌을 마무리하였다.

김성근 대행체제 이후 새로운 마무리 신윤호의 등장 등으로 팀 방어율을 끌어내렸음에도

불구하고 ERA 5.09으로 8개 구단 중 가장 나쁜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으며,

특히 퇴출 시점까지 팀내 최다 타점을 기록하고도 김성근과의 불화로 퇴출된

댄 로마이어의 공백으로 인한 거포 부재는 많은 출루에도 불구하고 다득점으로 이어지지

못하게 하는 답답한 경기력을 야기했다.

이럴거면 스미스를 왜 버렸나 팀 성적은 저조했으나 개인타이틀은 화려했다.

1994년 고졸신인으로 입단 후 7년간 무명에 불과했던 신윤호는 김성근의 감독대행 부임이

이루어진 5월 중순부터 마무리를 전담하며 데뷔 후 최고의 시즌을 보내

다승과 승률, 구원 3관왕과 함께 투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MVP 투표에서 1차투표 1위를 차지하며 2차투표까지 갔으나 1차에서 자신과 이승엽에게

투표하지 않은 기자들이 이승엽에게 쏠리며 아쉽게 LG 역사상 첫 MVP 수상은 무산되었다.

이병규는 1999년부터 프로야구 최초로 3년 연속 최다안타왕에 오르는 주인공이 됐고,

득점 1위에 오르며 타격 2관왕을 차지했다. 

양준혁은 9년 연속 3할 타율과 함께 타율 0.355로 통산 4번째 타격왕을 수상했다.

2001 시즌 70만 7,144명의 홈관중이 입장하며 8개구단 중 최다관중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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