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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나에 지나간시절

1982년 MBC청룡 과 2022년 LG 트윈스

by mostheri 2022.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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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2년 대한민국 프로야구 시작과 MBC 청룡 

대한민국 프로야구 시작한 지가 올해로 딱 40년 되었습니다!

저는 티스토리 포스팅을 하다 보면 여러 번 사용하는 단어가 시간 참 빠르다 

이건 저만 사용하는 게 아니라 제나 이때나 아니 제가 어렸을 때 나이 드셨던 분들이 하셨던

말씀 이신대 이제는 제가 자주 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MBC 청룡! 서울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면 제나 이때나 저보다 어리신 분들이나 MBC 청룡 

모르시는 분 없으시죠? 제가 예전에 사업을 할 때 같이 지내던 직원이 있는 대 아! 그 직원도

이제 50이 되었네요 나이를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고 서울에서 태어난 넘이 왜 두산 팬인지

그게 좀 이해가 되지 않아서요  서울! 하면 MBC 청룡! LG 트윈스! 아닌가요?

그런데 더 못마땅한 것은 저~~~ 기 다른 곳에서 서울로 온 촌** 이 LG 보다 우승을 많이

했다는 게 참으로 답답~~~ 할 노릇입니다 

저는 사실 프로야구에서 LG를 좋아하긴 하지만 운동장에 가본 적도 없고 그렇게 야구에 대해서 

깊이 알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매년 LG가 이제는 우승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경기 때는 

매일 집에서 경기를 보고 있습니다 재작년! 그리고 작년! 참 답답하고 해서 내년부터는 야구를 

보지 않으리 했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올해는 뭔가 될 거 같기도 한대...

LG는 항상 2% 가 부족해서...

그래도 올해는 꼭 우승을 했으면 하는 마음이고 오늘부터 MBC 청룡부터 2021년 LG 트윈스

까지의 역사를 포스팅해 보려고 합니다

물론 오래된 역사라서 제 기억만으로는 할 수 없고 인터넷 자료들을 할 용 하면서 저역시도

청룡과 트윈스의 역사를 공부해 볼까 합니다 

 

♥ 1982년 MBC 청룡과 8개 구단의 창단 

 

MBC는 1981년 6월부터 창사 2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프로야구단 창단을 구상하고 있었다.

MBC가 먼저 팀을 만들면 다른 팀들도 뒤따라 창단해서 프로야구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정부 차원에서 프로야구 창설이 추진되자 MBC는 자신들의 우선권을 주장하고 나섰고,

연고지도 최대 시장인 서울을 고수했다.

프로야구를 추진한 측에서도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방송사가 참여해야 프로야구를 홍보하고 확산시키는 데 유리하다는 이유였다.

팀명으로 공모와 심사를 거쳐 '청룡'으로 정해졌다.

 MBC 관계자에 따르면 공모 결과 ‘드래곤즈’란 이름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외래어인 데다 가까운 

일본에도 유사한 팀명이 있어 청룡으로 부르기로 했다고 한다.

MBC 사옥이 자리한 정동이 옛날부터 ‘용마루’로 불렸다는 것도 청룡이 선정된 이유 중 하나였다.

한편 초대 감독에는 원래 ‘빨간 장갑의 마술사’ 김동엽 감독이 유력했다.

김동엽 감독은 당시 MBC에서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은 물론 MBC의 프로야구단

창단 과정에서도 많은 일을 했다. 하지만 정작 그를 데려간 것은 해태였다.

물론 13 경기만 치르고 물러났고 내년에 청룡으로 오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재일교포 출신

김영덕 감독도 고려 대상이었지만 OB에서 먼저 영입했다.

대안으로 박현식, 배성서 등의 이름이 거론되다가 일본에서 돌아온 한 거물급 인사의 이름

석자에 모든 것이 정리됐다.

1981년까지 일본 프로야구에서 선수로 활약한 백인천이 주인공이었다.

MBC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6천만 원의 거액을 주고 백인천을 초대 감독으로 영입을 완료했고, 

MBC는 프로야구 개막일까지 방송을 통해 연일 일본과 미국 프로야구의 명장면을 내보내며 

프로야구 붐을 조성하는데 주력했다. 

1982년 2월 26일, 서울 문화체육관에서 MBC 청룡의 화려한 창단식이 열렸다. 

이날 창단식에는 박영수 서울시장, 서종철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는 물론 MBC 소속 

인기 탤런트와 코미디언들이 대거 참석하였다.

 

MBC청룡 창단맴버

 

설상가상 백인천 감독과 구단프런트와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했다. 일본에서 프로야구를 먼저 경험하고 온 백인천 감독은 자신의 노하우를 최대한 구단에 전해주려고 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기보다 충돌만 낳았다. 전지훈련이 필요해서 강릉에 가려고 했는데 사람들은 아마야구 생각만하고 뭐하러 멀리까지 가서 하느냐고 반문을 했을 뿐터러 야구공과 장비를 지원해 달라고 했더니 뭐가 많이 필요하냐면서 공은 한박스만 가지고 가서 하다 모자라면 또 한 박스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식이었다. 게다가 방송사가 민간기업이 아닌 공기업이다보니 뭐하나 요구하는게 여간 힘든게 아니였다. 결재해서 상부의 승인을 받기까지 십여 단계를 거쳐 올라기곤 했다. 그런 문제들을 회사 관계자들에게 이해시키려고 노력을 많이 했는데 정작 사람들이나 언론에서는 트러블을 일으킨다는 식으로 표현했다. 1982년 3월 27일 프로야구 개막 

 

1982년 3월 27일 동대문야구장에서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로 역사적인 

한국 프로야구 원년 개막전이 치러졌다. 

연장 10회 말에 터진 이종도의 끝내기 만루홈런으로 프로야구 1호 승리팀이 되었다.

 

이날 경기는 MBC TV와 KBS 1 TV가 동시에 생중계했다.

원년 개막전의 매치업은 당시 최고의 팜으로 불렸던 대구·경북 팜의 우월함을 앞세워 당대 최고의

스타군단으로 군림하던 삼성 라이온즈와 일본에서 타격왕을 거머쥐었던 백인천 감독 겸 선수를

앞세운 서울 연고팀 MBC 청룡으로 정해졌다.

이날 경기 시구는 전술했다시피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했는데 이 당시 대통령의 그라운드

입장 장면을 보면 같이 들어오는 유니폼 차림의 선수들이 어딘가 모르게 어색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진짜 선수가 아니라 대통령 경호실 소속 경호관이었다.

 

이 경기는 초반까지만 해도 삼성의 압도적 우세였다.

1회 초 함학수의 타구를 MBC 1루수 김용윤이 놓치면서 2사 2루가 됐고 다음 타자 이만수가

좌익선상으로 흐르는 2루타를 터뜨리며 선취 득점에 성공한다.

이 2루타는 KBO 리그 통산 1호 안타 겸 1호 장타 겸 1호 타점 기록이 됐고 함학수는 KBO 리그 

통산 1호 득점자가 됐다.

이어지는 공격에서 송진호가 친 뜬 공 타구를 MBC 유격수 정영기가 놓치면서 2루에 있던 이만수가

득점해 2:0으로 앞서간다.

2회에도 선두타자 김한근이 볼넷으로 출루한 뒤 정구왕이 우익수 키를 넘는 3루타를 터뜨리며

3:0이 됐고 배대웅의 후속타로 한 점을 더 달아나 4:0이 됐다.

그리고 이어지는 공격에서 함학수가 친 내야 땅볼을 MBC 2루수 조호가 악송구 한 사이 배대웅이

홈으로 들어와 무려 5:0이 된다.

또 이 회에서 이길환이 4번 타자 이만수 타석 때 보크를 범해 통산 1호 보크 기록자가 되었다.

물론, MBC도 추격에 들어갔는데 2회 말 2 아웃 1, 3루 상황에서 정영기가 우전 적시타를 치며

한 점을 추격했고 4회에도 1점을 내 야금야금 추격하게 된다.

 

5:2 상황이 된 5회 초 공격 때 선두타자로 이만수가 볼카운트 3B-1S 상황에서 MBC 투수

유종겸의 몸 쪽 높은 볼을 그대로 당겨 쳐 서울운동장 야구장 좌측 담장을 넘는

솔로 홈런을 터뜨린다.

이로써 이만수는 KBO 리그 통산 1호 안타, 1호 장타(2루타), 1호 홈런, 1호 타점을 한 경기에

기록한 전무후무한 대기록의 보유자가 된다.

그러나 이후부터는 MBC가 맹렬히 추격하는 양상을 띠게 된다.

5회에 1점을 더 낸 MBC는 6회 말 선두타자 백인천이 초구를 받아쳐 중월 담장을 넘는

솔로 홈런을 터뜨리며 3점 차로 바짝 뒤를 쫓게 된다.

 

그리고 문제의 7회. 2 아웃 후 송영운이 출루한 후 김용달이 안타를 터뜨리며 2아웃 1, 3루

상황이 됐다. 타석에 들어선 이는 실업야구의 강타자였던 유승안. 유승안은 황규봉의 초구를

그대로 밀어쳐 우측 담장을 넘는 동점 3점 홈런을 터뜨렸다.

7회 7:7 동률을 이룬 양 팀은 8회와 9회를 득점 없이 보내며 연장전에 돌입하게 된다.

연장 10회 말 공격에 들어선 MBC는 선두타자 김인식이 몸에 맞는 볼을 맞고 나가면서

역전 주자를 내게 된다. 이어진 대타 김봉기는 삼진을 당했지만 다음 타자 김용달이 좌전안타를

쳤는데 이때 김인식이 1루에서 3루까지 전력 질주하는 공격적 주루 플레이를 선보였다.

상황은 1 아웃 2, 3루. 타석에는 7회 동점 쓰리런의 주인공 유승안. 외야 플라이만 쳐도 경기는

MBC가 이기기 때문에 삼성의 이선희-이만수 배터리는 유승안을 거르고 만루를 채운 뒤 다음

타자와 승부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삼성 배터리는 작전대로 3 볼까지 스트레이트로 볼을 뺐는데... 난데없이 유승안이 네 번째 공을

쳐버리더니 이 볼이 투수 앞 땅볼이 됐다.

치는 순간 홈으로 들어온 김인식은 태그아웃(...). 김인식은 홈에 들어오는 순간 손가락질을 하며

"아! 왜 친 거야 진짜"라고 푸념을 하며 홈으로 들어갔다.

나중에 말하길 유승안이 그 상황에서 볼을 쳐버린 것은 개막전 MVP에게 주어지는 경품이었던 

오토바이에 눈이 멀어서 그랬다고(...). 그래서 상황은 2 아웃 1, 3루.

다음 타자는 6회 솔로 홈런을 친 백인천. 삼성 배터리는 백인천도 무시무시하기 때문에 고의사구로

그를 거르고 다음 타자인 이종도와 승부하기로 했다.

2아웃 만루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선 이종도는 2B-0S 상황에서 한가운데에서 몸 쪽으로 살짝 빠진

공을 그대로 당겨 쳐 좌측 담장을 살짝 넘기는 개막전 끝내기 만루홈런을 기록한다.

이 만루홈런에 힘입어 MBC가 11:7로 승리를 거두게 됐고 승장이 된 백인천 감독은 언론 인터뷰 때

일본에서 당했던 서러움이 폭발한 나머지 눈물을 흘렸다.

이러한 드라마틱한 승부를 바탕으로 한국 프로야구는 승승장구하게 된다.

대다수의 야구 전문가들이 전국에서 가장 많은 고교야구팀을 보유한 서울 지역을 연고로 하는 

청룡을 삼성과 함께 상위권을 다툴 우승후보로 점찍었으나 예상외로 전기리그와 후기리그 

모두 3위에 그쳤다. 

선수단 구성에서 먼저 문제를 드러냈는데 서울지역 선수들을 대상으로 한 드래프트에서 그해 

세계선수권 대회 출전으로 당장 팀 합류가 불가능했던 김재박과 이해창을 지명하여 전력에 

보탬이 되지 못했고,이광은도 시즌 개막 시점에서는 성무(공군) 야구단에서 복무 중이었는지라

전역 후에 뒤늦게 합류할 수 있었다.

반면 MBC에 밀려 대전으로 간 OB는 박철순을 지명했으며 그는 22연승이라는 불멸의 기록과 함께

원년 우승의 결정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이로 인해 MBC는 하기룡과 이길환, 이광권이 마운드의 주축을 이뤘지만 확실한 에이스가 없다는

뚜렷한 약점을 가지게 되었다.

게다가 지나치게 특정 포지션에 편중된 선수단 구성으로 포수 출신인 이종도와 신언호가 외야수를

봐야하는 수비력에도 허점이 많았던 것이다.

신언호의 외야 송구 능력은 뛰어났지만. 결국 1982년 4월 15일 광주 무등야구장에서 해태 타이거즈를

상대로 1경기 7실책을 저질러 32년 후 SK 와이번스가 그 기록을 깰 때까지 KBO 흑역사의

한 귀퉁이를 차지했었다.

 

설상가상 백인천 감독과 구단프런트와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했다. 

일본에서 프로야구를 먼저 경험하고 온 백인천 감독은 자신의 노하우를 최대한 구단에 전해주려고

 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기보다 충돌만 낳았다. 

전지훈련이 필요해서 강릉에 가려고 했는데 사람들은 아마야구 생각만하고 뭐하러 멀리까지 가서 

하느냐고 반문을 했을 뿐터러 야구공과 장비를 지원해 달라고 했더니 뭐가 많이 필요하냐면서 

공은 한박스만 가지고 가서 하다 모자라면 또 한 박스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식이었다. 

게다가 방송사가 민간기업이 아닌 공기업이다보니 뭐하나 요구하는게 여간 힘든게 아니였다. 

결재해서 상부의 승인을 받기까지 십여 단계를 거쳐 올라기곤 했다. 

그런 문제들을 회사 관계자들에게 이해시키려고 노력을 많이 했는데 정작 사람들이나 언론에서는 

트러블을 일으킨다는 식으로 표현했다.

아! 이때부터 구단프런트문제가 시작되어 아직까지 그런가 봅니다 

 

♥ 사건사고 몰수게임

 

.1982년 8월 26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원정 경기에서 프로야구 첫 몰수경기가 있었다. 

삼성이 5대2로 앞서 있던 2회말 1사 1,2루 상황에서 삼성의 타자 정현발이 유격수 땅볼을 쳤는데 

1루 주자 배대웅은 병살을 막기 위해서 2루수 김인식 쪽으로 거칠게 슬라이딩을 하면서 

김인식과 충돌했다. 김인식은 화를 내며 배대웅의 얼굴을 때렸고, 곧바로 양팀 선수들이 몰려나왔다.

심판들은 선수들을 떼놓은 후 김인식을 퇴장시켰다.

이에 백인천 MBC 감독은 원인 제공은 배대웅이 했는데 김인식만 퇴장시킨 것은 부당하다며

선수들을 철수시켰다. 주심의 경기 속행 요구에도 백인천은 계속 무시했고,

결국 몰수게임이 선언됐다.

사실 이 사건에는 소소한 반전이 있는데, 김인식은 벤치 클리어링이 벌어지기 전에 바로 사과했고 

배대웅도 사과를 받아줬다. 

또한 김은식 작가의 인터뷰에서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본인들은 절친한 친구관계였고 일종의 쇼맨십 

차원에서 서로간에 장난으로 한 행동인데 생각보다 일이 커지는 바람에 양 당사자 

모두 당황했다고 한다

 

MBC청룡은 일본의 주니치와는 같은 언론사 팀이라는 점으로 자매결연을 맺었다.

이는 LG시절까지 이어져 2000년대 중반까지도 마스코트 교류행사 등이 이어졌었다.

김재박은 시즌 막바지에 합류해 세 경기에 출장하지만 안타는 기록하지 못했다

백인천 선수겸 감독은 프로야구 역대 최초이자 최후 4할 타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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