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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나에 일상생활

나에동생 가족이야기 와 암 치료방법

by mostheri 2022.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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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 동생 가족 이야기 

저는 4형제중 장남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 도 제가 모시고 있다가 임종하실 때 곁에 있었고 어머니 또한 그럴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동생들에게 큰형으로써 제대로 도와준 것은 없지만 부모님 만큼은 생을

마치실 때까지 제가 모신다고 동생들에게 약속을 한 것입니다 

제 동생들 중에 둘째는 제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7년 동안 일을 같이 하게 해 주어서 다른 동생

들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같이 지내서 제수씨 나 조카들과의 정이 다른 동생들 가족보다 

더 끈끈한 정이 있습니다

제가 둘째 동생과 시간을 오래 해서 하는이야기가 아니고 제형제들 중에서 가장 행복한 가정이라고

느끼고 비록 러시아 가 2014년 우크라이나와 크림반도 전쟁 때문에 모든 걸 잃고 한국에 와서도

가족을 지키고자 많은 직원을 거느렸던 동생이 택시운전을 3년 동안 하는 것을 보고 동생은 나와 많이

다르고 제가 어릴 때 꿈이었던 행복한 가정을 꾸미고 있구나 하는 부러움이 들기도 했습니다 

제가 가끔 포스팅을 하면서 아직 결혼하지 않은 남, 녀 나 이제 신혼인 부부에게 다산을 이야기를 

가끔 하는 것은 자식이 많으면 키우기는 어렵지만 성장 후 형제, 자매 중에 하나가 성공하면 모두 다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이고 그것을 보여준 것이 저희 4형제 중 둘째가 1993년 대한민국과 수교도 되지

않은 러시아 이 가서 셋째, 막내 그리고 2008년 저까지 모두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일을 한 것을 보면

혼자보다는 여럿이 있는 형제가 삶에 있어서 서로 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 어머니는 오래전부터 불교신자이셨습니다 할머니께서 산에 가서 기도를 하고 아버지를

낳으셨다고 하셔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시어머니 생각에 절에 다니셨다고 합니다 

제가 중학교 때까지 어머니는 집에서 시간을 정해 놓으시고 불경을 낭독 하 실정도 로 불교에 대한

믿음이 무척 크셨던 어머니이십니다 

그래서 저희 형제들이 교회에 가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어머니 에게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

이었고 저희들도 종교에 대해 그다지 별 관심이 없었지만 제가 중학교를 영락교회에서 만든 

영락중학교와 기독교학교인 명지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기독교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었지만 

저는 장남이다 보니 아버님이 하시는 사업도 있고 불교에 대한 믿음이 강한 어머니 영향으로 

고등학교 때 잠깐 교회를 다녔지만 신앙심이 깊지는 않았습니다 

그 후 애엄마가 자기에 가장 큰 소원이 남편과 자식 손잡고 교회 가는 것이라고 해서 같이 다니기는 

했지만 가족보다 교회에 더 신경 쓰는 애엄마와 많이 갈등을 하게 되었고 헤어진 후로 교회 가는 일

없고 아니 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동생도 종교에 대한 생각 이 없었는데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오랜 시간 동안 혼자 생활하다가 

2009년 가족들이 모두 모스크바에서 함께 살면서 자식들이 낯선 곳에서 힘들어하자 자식들을

데리고모스크바에 있는 한인교회에 데리고 가서 한국인 학생들과 어울리게 하다가 신앙에 대해

눈을 뜨기시작하여 매우 적극적으로 교회에 가서 봉사도하고 교회 시설물을 거의 무료로

고쳐주기도 하면서종교에 대한 공부를 집에서도 따로 할 정도로 신앙심이 깊어졌습니다

제가 6년 동안 미션스쿨을 다녀서 특히 중학교 때 기독교에 대한 수업을 받아서 기독교 내용에

대해 조금 알고 있어서 러시아에서 선교할 동을 하는 선교사 이야기를 들으면서 몇몇 선 교사

외에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선교가 목적이 아닌 다른 것에 목적을 두고 있는 선교사들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기독교에 대한 생각이 그다지 좋지가 않습니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그렇지는 않지만 교회 목사들이 본인의 신분을 망각하는 목사들이 한국에

꽤 많이있습니다

교회 목사는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중간자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고 저는 생각하는데 

목사 본인이 곧 자기가 하느님 같은 행동을 하는 목사들이 매우 많이 있습니다

교회 신자 들 또한 그렇게 생각을 하고 목사를 하느님이라 생각하고 따르는 사람들도 꽤 많이

있어 가끔 사회 문제로도 나오고 하지 말라는 일도 꽤 많이 하여 선교를 한다고 가지 말라는

나라에 가서 인질로 잡혀 국가 가 배상을 해주고 데려오거나 혹은 그곳에서 살해당하는 일도

종종 있어서 종교에 대한 신뢰가 저에게는 없습니다 또 이야기가 어뚱 한 곳으로...

동생이 기독교를 믿는 것에 대해 어머니의 반대 가 매우 심했습니다

하지만 둘째도 나이가 50대 이고 한집안의 가장이기 때문에 어머니께서 이야기만 했지

그 이상 어찌할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동생이 교회에 나가면서 담배도 끊고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노력하는 동생에게 이왕

시작한 거깊은 신앙심을 가지라고 격려해주었지만 걸리는 부분이 제가 중학교 때

성경수업시간에 믿음이 깊어지면 하나님이 시험을 위해 시련을 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그 부분이 좀 걱정이 됐습니다 

♥ 동생에게 다가온 시련

불안한 생각은 현실로 다가온다고 했나요? 동생의 시련은 의외로 빨리 찾아왔습니다 

2012년 모스크바에 있는 제일기획에서 큰 오더를 받아 6개월 동안 열심히 작업을 하여 적잖은

수익을 내고 2013년 한국 기업 모스크바 지사와 의견이 맞아 넓은 공장부지를 같이 사용하면서

사업에 전환점을 맞는 듯하였으나 2014년 러시아 가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전쟁을 하느라 서방

국가의 경제 제제로 러시아의 환율이 2배로 덜어지게 되었습니다 1$에 30루블 하던 환율이

1$ 60 루블까지 떨어져 한국의 대기업들은 하나둘씩 지사를 철수 하기 시작하고 한국기업을

대상으로 납품을 하던 동생 회사도 직원들을 감축하고 버티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아 저와

제 동생은 러시아에서 재배되지 않는 멜론을 카자으스탄이나 우즈베크 키스탄에서 수입하여

판매하기로 하고 제가 카자흐스탄에 가서 멜론을 매입하여 모스크바로 보내기로 하고

카자으스탄으로 갔습니다 

옛 소련의 일부분이었던 카자흐스탄이 러시아와 가깝다고는 하나 24톤 차량이 모스크바까지

오려면 4박 5일 정도의 아주 먼 거리였습니다

그리고 멜론을 수입할 때 1~2톤을 수입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이 24톤 차량이기 때문에

보통 22톤을 매수해서 보내야 하는데 22톤을 한 농장에서 적재하는 게 아니라 작은 농장에서

경작한 멜론을 경운기로 각각 운반을 하다 보니 22톤을 적재하는데 꼬박 하루 가 걸리는

그리 녹녹지 않은 작업이었습니다

그리고 멜론은 과일이라 수확 후 시간이 오래 경과가 되면 제값을 받기보다는 그냥 버려야 하기

때문에 수확후 시간싸움이며 운반비만 한화 600만 원이 드는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우즈벡 직원 말 만 믿고 시작하다 보니 경험이 없어 일주일만 일찍 가서 출발시켰으면 어느 정도

수익을 낼 수 있었지만 제가 갔던 시기 에는 많은 과일 무역상이 멜론을 여기저기서 모스크바로 

가져오다 보니 수익은커녕 겨우 원가만 건진 채 저는 우즈베크으로 가서 다른 일을 찾아보았으나

마땅한 일이 별로 없고 자본금 또한 많지가 않아 동생은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에 온 외국인들에게

식품을 팔려고 시도를 해보았으나 그것도 여의치 않아 동생은 중국으로 식당을 하기로 하여

중국으로 가고 저는 우즈벡에 있다가 2016년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둘째 동생은 1993년 러시아로 가서 고생하다가 항공화물 운송을 시작하여 1997년 한국 IMF 때

큰돈을 벌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러시아 IMF로 거의 망하다시피 하여 중국으로 갔던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하느님이 동생의 신앙심을 시험해보는 시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동생에게 찾아온 두 번째 큰 시련 

동생은 중국에 가서 식당을 하였으나 중국에 한국인이 많기는 하지만 한국식당 또한 매우 많이 

있습니다 동생이 중국으로 간 것은 예전 에코비스를 할 때 중국에 사업체가 있어서 중국 광저우

에서 2년 정도 생활을 했었고 같이 동업을 했던 친구가 그곳에 있어서 간 것인데 생각처럼 장사가

잘 되지 않아 1년 정도 장사를 하다가 정리를 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다른 사업을 했는데 사업운이 

다했는지 그것 또한 잘되지 않아 정리하고 택시를 했던 것입니다 

불행은 한꺼번에 온다고 했나요? 

저는 한국에 있다가 코타키나발루로 나가고 동생은 3년 정도 택시를 하였는데 건강하던 제수씨

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해본 결과 난소암으로 판명되어 동생은 택시 

를 하면서 제수씨 암 치료를 병행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보질 못했는데 재수 씨는 항암치료를 받다 보니 머리카락이 다 빠진 것을 어머니는

보았다고  합니다

다행히 항암치료가 잘 진행되어서 제수씨는 건강하게 2021년 제 생일날 어머니 집으로 

와서 같이 식사를 하면서 건강을 되찾는듯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재수 씨는 허리가 아프다고 걷지도 못하겠다고 하여 다시 검사를

받았는데 암이 척추로 전이가 되어서 다시 항암치료를 받았으나 그 이후로 걷지도 못하고

침대에 누워서 치료를 받았으나 병원에서는 더 이상 치료가 무의미하다고 해서 동생은

자연치유를 하기로하였습니다 

제 아버님도 그렇고 코타키나발루에서 만난 나이 어린 친구도 그렇고 암 이란 병은 한 곳에만 암

을 발견하여 치료하면 완치가 가능하지만 문제는 다른 장기로의 전이가 되면 치유하기가 매우 

힘든 병인 것인 것입니다 병원에서 환자가 암에 걸리면 다른 곳에 전이되는 것도 예상을 하고 세밀

하게 치료를 해야 하는데 경험이 많지 않은 의사들은 거기까지 생각을 하지 못하는 거 같습니다 

제 아버님 같은 경우는 암을 발견했을 당시 다른 장기까지 전이가 되었기때문에 치료가

어려웠지만 제수씨 같은 경우 난소암을 발견했을당시 다른 곳에 전이가 될 것을 생각하고 치료를

해야 하는데 난소 암만을 생각하고 치료한 후 완치가 되었다고 하여 척추에 전이되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2021년 10월 척추에 전이된 것을 알게 된 후 병원에서 치료를 포기하고 집에서 자연치유를

하면서 동생은 이미 알고 있는 듯 러시아 모스크바에 근무하고 있는 큰아들을 오라고 하여 2주

정도 집에서 머물다가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간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재수 씨는

가족 곁을 떠나가고말았습니다

동생은 딸 하나 아들 둘이 있는 다복한 가정입니다 큰딸은 2019년 결혼을 했고 큰아들은

모스크바 에 있는 한국의 서울대학과 같은 러시아 엠게우 대학을 졸업하고 모스크바 현대자동차

에 입사하여 근무하고 있고 막내아들은 군 복무 대체 직장을 다니고 있어 재수 씨만 건강했다면

부유하지는 않지만 행복의 조건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는 행복한 가정이었기에 재수 씨의

죽음은 더욱더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2009년 러시아로 가족들을 불러 같이 살면서 모든걸 잃고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그래도 큰아들 하나만은 러시아 로 가족을 불러드린 보람을 동생은 찾았던 것이었습니다 

어머니에게 는 충격이 크실 거 같아서 아직도 제수씨의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동생에게 요즘 가끔 전화 를합니다 올해 초부터 마음속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막상 당하고

나니 멍멍하다고 합니다 

사람은 언제 가는 죽게 됩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모든 사람과 이별을 생각하고 

평생을 살아야 하는 불행한 동물 이기도 합니다 

아버지께서 돌아 가신지 벌써 25년이 지났습니다 저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로 암에 걸린 사람

이 주위에 있으면 암 2기 이상은 절대로 병원 가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의학이 많이 발전되었다고

하나 암 2기가 넘어서면 치료도 어렵고 레지던트 실험용 이 되는 것 같고 비용도 한 만만치가

않습니다 병원을 가느니 차라리 식이요법을 하면서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치유 를하는것이

생존율을 더 높일 수가 있습니다 

코타키나발루에서 만난 가이드 도 자연치유를 권유했으나 제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않고 스페인

가서민막을 한다고 준비하다가 죽었습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혼자 지냈고 지금은 어머니와 같이 있지만 동생은 지금 막내와 같이 살고

있습니다 의지력이 강한 동생이라 다시 의욕을 찾고 생활하리라 믿고 있습니다 

노래 가사가 있지요 "있을 때 잘해" 이혼을 하지 않고 같이 살고 있다면 서로를 존중해주고

사랑하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백세 인생 이라고 하지만 그다지 긴 시간이 아닌듯합니다 

모두 사랑하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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