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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나에 일상생활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이야기

by mostheri 2022.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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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년대 대중문화의 상징 

2018년 70년대 록그룹의 상징인 영국의 퀸 그룹의 프레디 머큐리 일생을 영화로 만든 

보헤미안 랩소디가 흥행에 성공하자 2022년에 50년대 로큰록의 상징 인 엘비스 프레슬리

를 엘비스란 영화가 개봉되었습니다 

프레디 머큐리 나 엘비스 프레슬리 나 세계인들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아서 그런지 참 빨리도 

세상을 등졌습니다  45세,42 세 한참 나이에 죽었습니다 

영화인들은 장수 를 하는 사람이 많은데 가수 들은 장수하기 가 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연기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가수들은 노래를 할때 정말 혼신에 힘을 다하여야 하기 때문에 

외국 같은 경우 마약이나 대마초 등을 복용하고 피는 경우가 많아서 그 후유증으로 일찍 단명하는

것 같습니다 연기자 같은 경우 실수를 하면 NG 후 다시 연기를 하면 되지만 가수들은 공연에서 

실수를 하면 큰 망신과 마음에 상처가 크기 때문에 매우 긴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립싱크를 하는 가수 그룹들도 많은데 그런 가수들은 진정한 가수라 할 수가 없고 진정한 

가수는 라이브에 강한 가수를 대한민국의 조용필님 처럼 가왕이라 칭호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대학교 다닐때 군대 가기 전까지 2년 정도 음악을 했었는데 우리나라 실정에 약 같은 것은 

말도 되지않고 공연하기 전 맥주 한잔 정도 하고 무대에 서면 마음 편하게 공연했던 생각이

납니다 제가 엘비스 프레슬리 를 기억하는 것은 어릴 적 집에 전축이 있어서 부모님이 들었던

음악이고 겨울에 스케이트 장에서 들었던 노래 라 노래는 기억하고 있었지만 가수가 누구인지

는 알지 못하다가 1977년 8월16일 로큰롤의 황제 사망! 이란  뉴스소식을 전하면서 그의 히트

노래를 방송에서 들으면서 아! 이노래를 부른 사람이 엘비스 프레슬리였구나 하고 일게 된 것이

제가중학교 3학년때 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1973년 하와이 콘서트를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으로 생중계된 공연이였고 그 당시 박정희 대통령 큰딸이신 전 박근혜 대통령도 

하와이 공연을 보고 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60년 말부터 70년대 세계의 젊은이에게 매우

큰 인기 를 끌었던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 엘비스 에런 프레슬리 Elvis Aaron Presley(1935/1/8~1977/8/16)

미국의 가수 겸 배우.

1950년대 혜성처럼 등장하여 당시 주류 미디어들이 천박하다고 경멸하던 로큰롤 음악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당시 대중음악계의 판도를 뒤집어버린 로큰롤의 제왕이자 당시 젊은

세대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우상으로서 여겨지게 된 50년대 대중문화의 상징. 

엘비스 프레슬리의 등장으로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핵심이 중장년층에서 10대로

옮겨가게 되었다.

현재 20세기 대중문화의 상징 중 하나이다 엘비스는 1950년대 초반부터 기타를 배우면서

가수의 꿈을 키우고 있었고 그와 함께 음악적 교류를 하던 사람들이 브루넷츠 형제였고 사실

엘비스는 여러가지 밴드나 가수 경연대회에 수차례 응모했다 떨어진 전적이 있으며, 새 멤버를

구하는 기성 밴드들의 오디션에 응모했다가 떨어진 일도 비일비재했다.

트럭 운전수 일을 하며 꾸준히 오디션에 참가했으며 어머니를 위해 제작한 판은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심리적인 압박을 견디지 못해 자작판이라도 만들어 선물하자는

결심으로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 미국이 징병제를 시행하고 있었고 이것으로 병역의무가 부과되어 1958년에 입대했다.

주 서독 미 육군에서 복무를 했는데, 이때 독일 민요

Muss i denn, muss i denn zum Städtele hinaus(노래는 즐겁다)를

'Wooden Heart(목석같은 마음)' 라는 곡으로 개사해 부른 게 유명하다.

이 곡은 엘비스가 출연한 영화 G.I.블루스에 삽입되었다.

이때, 그가 입던 군복은 지금도 잘 보관되어 있는데 나중에 경매로 팔려 다름 아닌 이란

팔라비 왕조 후손들이 미국에서 경매로 사서 지금도 소유 중이다.

공식적인 데뷔 후 하반신을 흥겹게 흔드는 당시로는 아주 파격적인 춤과, 흑인들의 전유물로
 
취급되던 로큰롤을 선보여 미국을 뒤흔들었고, 보수적인 세대들에게 혐오를 받았으나 젊은
 
층에게 그 인기는 대단했다.
 
70년대에도 엘비스의 인기는 여전했으며, 1973년 하와이 콘서트는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으로
 
생중계된 공연이 되기도 하였다
 
영화에도 많이 나왔다. 공연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제외해도 영화만 30여편이나 된다.
 
히트곡을 영화화했거나 영화에 나온 노래가 히트하는 식인 것이 많아 배우로서의 평가는 좋지 않다.
 
그래도 워낙 인기가 좋다보니 그가 나온다 하면 소녀 팬들이 몰려 가서 계속 영화는 찍을 수
 
있었던 것. 하지만 엘비스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체중이 늘기 시작했고, 약물 치료 등을 해
 
보았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1977년 1월 그의 몸무게는 350파운드(158킬로그램)에 달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1977년 8월 16일, 엘비스는 미국 테네시 주의 멤피스에서 자택의 욕조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고 42세의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요절했다.
 
일설에 의하면 변기 위에서 바지를 반쯤 벗은 채로 약을 맞다가 사망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런 사례 때문에 망가진 록스타의 전형으로 까이기도 한다.
 
그 밖에도 살을 빼기 위하여 손댄 게 마약이라는 소문도 있다. 그래서인지 로보캅 2를 보면
 
그의 사진과 그를 연상케하는 말라빠진 미이라가 잠깐 나오기도 한다.
 
마약밀매범들이 쾌락과 마약으로 죽은 가수라고 찬양하는 이미지.
 
그덕에 타블로이드 저널리즘의 대표적인 희생양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그에 대한 관심이 적어 보도되지 않지만, 아직도 많은 미국과 영국의 타블로이드들이
 
그의 사생활에 대해 근거없는 루머를 생산 중이다.
 
그런데 근래에 들어 새로운 사망설이 제기된다. 바로 변비로 인한 죽음이다.
 
실제로 엘비스 사망 후 부검에서 엄청난 양의 대변이 대장에서 검출되었고 몸무게가 갑작스럽게
 
불어난 이유를 근거로 신빙성이 떨어진다곤 할 수 없다.
 
이 사망설에 의하면 엘비스는 대변을 보지 못해 힘겨워했고 항상 대변이 마려운 그 상태가 멈추지
 
않은 상태로 살아야 하는 고통을 느꼈다고 한다.
 
주치의는 엘비스에게 항문 이식 수술을 권유하였으나 엘비스는 연예인 신분인 자신이 항문 이식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에 일어날 후폭풍을 견디지 못해 자꾸만 수술을 미루다가
 
계속 쌓이는 대변의 독성에 점점 더 중독되었다는 설이다.
 
또한 그의 약물 과다 복용역시 그의 심장마비를 부추겼을 수도 있다고 한다.
 
위에서 나온 주치의 역시 이를 인정하였으나, 이러한 처방은 엘비스를 마약에 손을 안 대도록
 
하기 위한 선택이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포레스트 터넌트 박사는 처방보다 10배 더 투여된 코데인 역시 약리학적인 분석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그 10배에 달하는 코데인 또한 치사량에 미치지
 
못한다는 판정이 났다. 그런데 코데인은 변비를 유발한다.
 
설사 치료제로 과거에는 코데인이 자주 처방되었다. 그리고 엘비스의 부검 당시, 많은 약물의
 
성분이 나온 건 맞지만 그 중에서 불법성 마약이나 알코올은 일절 나오지 않은 것 역시
 
주목할 만한데, 이는 엘비스가 말년까지도 마약이나 술에 쩔어 사는 방탕한 인물이
 
아니었음을 증명해주기도 한다.

♥ 엘비스  프레슬리 의 음악계 평가 

엘비스는 대중음악 사상 최초의 록스타이자 당시 음악계의 주류를 혼자만의 폭발적인 인기로
변화시켜버린 대중음악사의 거인으로 평가받는다.
엘비스의 등장 이전에도 리틀 리처드, 척 베리와 같은 초기 로큰롤 장르를 탄생시키고 활동한
아티스트들도 있었으나 로큰롤 장르를 영미권 대중음악의 주류로 끌어올리고 범세계적인
인기를 처음으로 갖게 한 장본인은 엄연히 엘비스 프레슬리였다.
엘비스가 일으킨 로큰롤 열풍은 스탠다드 팝, 재즈 등으로 대표되던 기성 대중음악계의 판도를
뒤집었으며 본고장인 미국뿐만 아니라 전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가 무수히 많은 '엘비스 키즈'들을
만들어 냈고 그렇게 자란 엘비스 키즈들이 1960-70년대 대중음악 시장을 지배한 전설적인
록 음악 아티스트들이 되었다.
북미 음악계에서 그의 위치는 아직도 확고해서 'King of Rock 'n' Roll'은 그의 별칭이기도 하다.
유럽에선 아직도 생존 가수들보다 더 많은 앨범 판매고를 올리는 등 유럽과 아메리카 지역
에서는 여전히 큰 인기를 누리는 중이다.
비틀즈는 엘비스를 보며 로큰롤 뮤지션으로서의 꿈을 키웠다.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 역시 60년대 초반까지 척 베리, 리틀 리처드, 버디 홀리와 함께 자신들에게
영향을 준 뮤지션으로 엘비스 프레슬리를 늘 언급했다.
그리고 엘비스와 만났을때의 경험과 감동을, 다들 노년에 접어든 1990년대에도 다큐멘터리에
나와서 감명깊게 얘기했다. 밥 딜런도 자신은 엘비스 프레슬리가 되고 싶다고 늘 말했었고,
실제로 그의 10대 시절 사진을 보면 가죽재킷과 리젠트 머리를 하면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패션을 그대로 따라한 모습들이 있다.
여기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위대함이 드러난다.
사람들이 흔히 작곡이나 프로듀싱 능력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국내에서도
이문세의 사례에서 보이듯이 대중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은 많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사랑을 받냐인 것이다. 60년대의 전설적인 록 스타들이 록의 꿈을 꿀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가장
핫한 로큰롤 스타인 엘비스 프레슬리를 보고 자랐기 때문이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로큰롤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가지게 된 것은 자신들에게 처음으로
'우상으로서의 로큰롤 그 자체인' 음악을 알려준 스타 혹은 아이돌이기도 했던 엘비스에 대한
경배이자 지지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엘비스가 최초로 레코드를 녹음했던 스튜디오에 밥 딜런이 와서 엘비스가 서있던 자리를
표시해 둔 흔적에 무릎을 꿇고 키스를 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마이클 잭슨이 음악 산업에 대변동을 일으키며 본격적으로 보는 음악의 시대를 열었는데 그 전에
보는 음악이 성공할 수 있을 지 가능성을 보여준 게 엘비스라는 말도 있다.
당시로서는 기성 세대들에게 폄훼를 받은 다리 떨기 등으로 큰 이슈를 끌었다.
한편, 마이클 잭슨은 엘비스에게서 받은 영향력은 없다고 말했다.
잠시동안이지만 영향력 대신에 딸을 받긴 했었다.
현대에서 엘비스가 '위대하다'고 평가되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그의 음악은 흑인음악이라는
점이다. 한마디로 "백인이 흑인음악으로 세계적인 사랑을 받았다".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흑백 인종차별이 매우 심하던 시대에 인종의 크로스오버를 성공적으로 이루었다는 점이다.
다만 사실 그것보단 엘비스가 백인이라서 대중에게 쉽게 어필할 수 있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이 때문에 많은 흑인 가수들은 엘비스가 우리의 노래를 빼앗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의 음악을 빼앗아다며 팻 분을 비난했던 리틀 리차드가 훗날 인정했듯, 엘비스를
비롯한 백인 스타들이 알앤비, 로큰롤을 대중들에게 소개해줬기에 그들이 재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걸 생각해야 한다.
또한, 현재와는 달리 기독교 힙합이나 록 등의 장르가 활성화되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로큰롤이
악마의 음악으로 여겨졌던 1960-1970년대에 < He Touched Me > 와 같은 가스펠 앨범들을
발매함으로써 선교 방식을 다양화하는 데 기여한 가수로도 평가받는다.
특히 미국에서 소위 Megachurch 라 불리우는 대형 교회들이 록밴드 또는 기타 대중음악팀을
필수적으로 고용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상당히 놀라운 혜안. 은근히 까도 많은 편이여서,
평가 절하하는 사람도 의외로 많으며 70년대 펑크 록 뮤지션들이 엄청나게 씹어댔다.
이들은 이전 세대인 히피문화부터 구닥다리 로큰롤까지 모두 척살 대상으로 삼았다(...).
심지어 더 클래쉬는 그들의 노래 "1977"에서 No Elvis, Beatles or Rolling Stones in 1977
이라고 노래했다. 그런데 클래쉬가 위에 언급된 뮤지션들을 싫어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애초에 그들의 앨범 London Calling의 커버 자체가 엘비스 프레슬리의 'Elvis Presley' 앨범에
대한 오마주였으니까. 커트 코베인은 자신의 기타 케이스에 엘비스의 욕을 적어놓기도 하였다.
이런 사실들과 말년에는 약물 문제로 인해 죽었다는 점에서 당대에는 평론가들에게도 대차게
까이기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관리의 문제일 뿐 음악적인 면에서는 엘비스가
대중들에게 아주 큰 인기를 끌었다는 점과 그만의 독특한 패션 등은 아직도 심벌처럼 남아
그가 남긴 영향력은 지속 돼 현재는 평론가들도 모두 인정한다.
적어도 엘비스가 있었을 때랑 없었을 때를 상상해 본다면 미국을 넘어 전 세계 대중음악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평가는 계속 변하는 것
저는 엘비스 프레슬리 노래중에서 이노래가 제일 신나고 기억나는 노래 입니다 .

Elvis Presley - Burning Love (Aloha From Hawaii, Live in Honolulu, 1973)

Elvis Presley - Burning Love (Aloha From Hawaii, Live in Honolulu,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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