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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나에 지나간시절

LG트윈스 를 향해서 나는 공을 던질수 없다 야생마 이상훈 투수

by mostheri 2022.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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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봉 6억을 포기한 LG 트윈스 야생마 이상훈 투수 

지금으로부터 18년 전인 2004년 그 당시 6억이란 돈 이 지금의 얼마만 한 가치일까요?

그 6억 이란 돈을 자신을 방출했지만 자신이 사랑한 구단이었기 에 사랑하는 구단에게 

공을 던질 수 없다고 젊은 나이에 은퇴를 선언한 선수 가 바로 LG의 야생마 이상훈 투수입니다

지금도 생각해 보면 너무 어이없는 일이며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LG프런트 에 의한 대표적인

희생양이 이상훈 투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1993년에 입단하여 일본의 쥬니치 드래곤즈와 미국의 보스턴 레드삭스 를두루 섭렵한 노련한

투수로 감독과 프런트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프랜차이즈 선수라고 할만한 선수를 SK로 트레이드

시키는 처사는 예전 선수협회를 만든다고 롯데의 상징인 최동원 선수를 삼성으로 트레이드시키는

것과 같은 매우 치졸한 감독과 프런트의 희생양입니다 

본인을 버린 구단에게 내가 사랑하는 LG에게 공을 던질 수 없다고 은퇴를 선언하고 선수 를마감한 

이상훈 투수와 같은 의리의 선수를 저버리는 LG 트윈스를 응원하고 있는 제자신이 너무 슬퍼 

보입니다 

구단 역사상 가장 많은 승리를 쟁취하고도 코리안시리즈에 가지 못했다고 LG 맨 인 유지현 감독을 

내치고 염경업 감독을 영입하고 LG를 대표하는 선수 모두를 타구단으로 보내 버리고 있는 작금의

사테태 에서 내년 신바람  야구를 추구하는 LG 트윈스가 어떤 팀으로 변할지 심히 걱정이 되는 시간

들입니다 

내년에 는 야구를 보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어절수 없이 LG 트윈스를 응원해야 하겠지만

타구단에서 지켜봐야 할  유강남, 채인성. 이형종 LG맨들의 모습을 어떻게 보고 어떤 느낌이 들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내년은 내년이고 LG 트윈스에서 큰 기쁨과 힘을 주었던 이상훈 선수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 나갈 수 있겠냐고 묻지 마시고 나가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언제고 던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LG트윈스 야생마  이상훈 투수

나갈 수 있겠냐고 묻지 마시고 나가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언제고 던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2002년 한국시리즈 당시 3경기 연속 등판으로 지쳐 있는 상황에서 던질 수 있겠냐는

양상문 투수코치 가이 상훈 선수 에게 물음에 답한 내용입니다 

이상훈 투수는 1993년 1차 지명으로 LG 트윈스에 입단 한 투수입니다 

주니치 드래곤즈, 보스턴 레드삭스, SK 와이번스 소속의 투수이자 가수.

前 LG 트윈스 2군 투수코치.

現 MBC SPORTS+ 야구 해설위원. 별명은 '야생마'. 특유의 장발이 말갈기 같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이러한 외적 특징 때문인지 일본 주니치에서의 선수생활에서 유니폼에 적힌

이름은 SAMSON LEE이다.

현역 은퇴 후에는 록밴드 What! 의 보컬 및 세컨드 기타를 맡고 있다.

대한민국 투수 중에서 구대성, 박찬호, 김병현, 임창용, 오승환과 함께 한, 미, 일 프로 무대를

모두 경험한 선수이자, 한미일 3개국 프로야구 1군 경기에 모두 등판했던 최초의 선수이다. 

구대성은 2005년 미국에 진출하며 이 기록을 달성했고 박찬호는 2012년, 임창용은 2013년, 

오승환은 2016년이었다.

 김병현은 일본에서 1군 기록이 없다. 아울러 한미일 3개국 1군 무대에 모두 섰던 날 기준으로

유일하게 만으로 20대에 달성하였다.

등번호는 47번(LG&SK) - 17번(주니치) - 40번(보스턴). 선수로 활동했던 12년 중 대한민국에서 뛰었던

기간은 7년밖에 되지 않지만, 1990년대 LG 트윈스의 신바람 야구를 상징하는 선수이자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했던 좌완 파이어볼러로 강렬한 임팩트로 인해 LG 팬들에게 사랑받는 선수이다.

그의 임팩트는 아직까지도 LG에게 크게 다가오기에, 그가 잠시 LG 코치를 맡았다 떠난 후

그의 번호 47번은 예우 차원에서 쭉 결번 상태로 남겨져있다

평균 구속 145km/h, 최고 구속 150km/h의 빠른 공을 던지는 좌완 파이어볼러로, 포심과 슬라이더, 커브, 

스플리터를 던졌으며, 포심과 변화구의 비율이 6:4~7:3 정도였다.

데뷔 초 선발 시절에는 포심과 빠른 슬라이더의 투피치였다가, 20승을 했던 1995 시즌에는 포심,

슬라이더, 스플리터의 3 피치였고 간간히 커브를 던졌다.

일본 시절까지 이 플레이 스타일이 유지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며 슬라이더의 비율을 조금 줄이고

포심 - 스플리터의 투피치로 던지다가 한국 복귀 이후에는 1995년 때의 플레이 스타일로 돌아가

포심 - 슬라이더 - 스플리터의 3 피치로 은퇴 전까지 유지하였다.

마지막 시즌인 2004 시즌에는 구종 다양화를 위해 슬로 커브나 싱커 등을 연마하기도 하였다.

 

♥ LG 트윈스 프런트와의 마찰 그리고 SK로 트레이드 

한 줄로 요약해서 설명하자면, 김재현과 함께 LG 구단의 스타였음에도 프런트와의 갈등으로 피해를

입었던 대표적 사례. 이 둘은 누구보다도 트윈스를 사랑했고, 트윈스 팬들에게 사랑받던 선수들이다.

2004년 LG 감독으로 이순철이 임명되면서, 당시 LG의 주축 선임이었던 유지현-서용빈이 순서대로

은퇴 수순을 밟고, 김재현은 부상 재발 시 책임 소재에 대한 각서를 구단에서 강요받아 이에 반발하여

SK로 이적한다.

선임들을 정리하는 과정 하나하나가 팬들 입장에서 납득하기 어려웠으나 매우 계획적으로

진행되었는데, 가장 결정판은 이상훈의 트레이드였다.

계획적이면서 단기간에 이런 일들이 한꺼번에 진행되었다는 것은, 이순철 감독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당시 젊은 신임 감독이었던 이순철 혼자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구단 프런트의 의중을 빼놓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이처럼 팬들의 사랑을 받던 스타 고참 선수를 홀대하며 벌인 LG 구단의 선택은 이후 10년이 넘게

지속된 부진의 출발점이 되었다.

감독이 된 이순철은 자기가 원하는 영입 선수들의 이름을 은연중에 언론에 흘리는 식으로,

간접적으로 기존 멤버들이 부족하여 교체해야 한다는 식으로 이상훈을 쫓아낼 명분을 만들었다.

언론에 진필중을 데려오고 싶다고 선언한 이상, 이상훈을 이미 팀 전력 외로 분류한 것이다.

여기에 기존 멤버들을 제대로 기용해주지 않고 2군에서 검증되지 않은 선수들을 계속 불러올려

실험하고, 이미 한물간 중고 FA들을 무리하게 떼돈을 주고 영입해 무작정 띄워주는 식으로

기존 멤버들을 도태시키는 식의 운영을 하였다.

그 과정에서 다른 팀으로 이적이라도 가능했던 김재현, 이상훈은 구단에서 내보내는 상황이 되어도

전혀 중재하지 않았고, 갑작스러운 부진으로 입지가 좁아진 유지현은 철저하리만치 무능한 노장으로

매도당하는 것을 방치했다.

특히 이순철이 이상훈과 기타 관련하여 신경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제대로 대화를 시도하지 않고

외면하였다는 것이 후일 이상훈의 인터뷰에서 밝혀졌다.

결과적으로 선수가 감독에 항명한다는 이상한 이미지로 왜곡되며 방출성 트레이드로 결말이 나고

말았는데, 계속 대화를 시도하던 애꿎은 이상훈은 해명, 화해의 기회 한번 없이 고향팀과

인연이 끊기고 말았다.

이상훈은 박동희와의 후일 인터뷰에서 당시 단순히 이순철과의 불화도 있었지만 이순철은

그 사태의 주연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밝히기도 한 만큼

(상술했겠지만 나중에 이순철과 만나 서로 오해를 풀었다), 당시 구단의 방향성이 이미 이상훈,

그리고 다른 베테랑들의 편이 아니었다.

그것도 모자라 2009년 7월에 LG 프런트가 그에게 복귀를 종용하다가 뒤통수를 날린 행각을 폭로하는

내용의 글을 2010년 4월 5일 LG 팬 게시판인 쌍둥이 마당에 올려 파문을 일으켰다.

나중에 밝히길 선수들은 구단을 상대로 항상 을의 입장인데, 운동을 그만둔 후에도 을이 돼야 하고,

있었던 일도 관점의 차이라며 없는 일로 만드는 처사를 두고 볼 수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 LG 트윈스 야생마 투수 이상훈의 또 다른 이야기 

유명한 별명으로는 '야생마', 그리고 머리가 야구선수 치고는 꽤 길어서 붙여진 '삼손'이 있다.
덕분에 주니치 시절의 등록명이 삼손 리 였다. 먼저 자리잡고 있던 이종범과「LEE」가 겹쳐서
즉흥적으로 결정한게 별명이었던 삼손 리. 데뷔 초창기에는 머리를 기르지 않았었다.
한국프로야구를 경험하고 일본이나 메이저에서 뛴 투수중 유일하게 피홈런이 없는 투수였다. 
주니치 드레곤즈시절 + 짧았던 보스턴 레드삭스 시절 시즌중 피홈런이 단 한개도 없던 투수였다.
구원 등판을 할 때 항상 불펜에서 마운드로 전력질주를 하며 올라갔는데, 그 열정적인 모습에
LG 팬들은 환호하고 상대 선수들은 기가 죽기도 했으며, 이 행동은 야구선수 이상훈을 대표하는
장면으로 남았다.
그러나 정작 은퇴 후, 이상훈 본인은 이 행동에 대해 자기가 그때 미쳤다면서 다른 투수들은 절대로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강조한다.
처음에는 자신도 무의식적으로 그런 행동을 취한 건데, 이게 팬들의 호응이 너무 좋아서 하면 안 되는
줄 알지만 어쩔 수 없이 뛰어서 마운드에 올라갔다고 밝혔다.
기사를 보면 미국에 있을 때부터 이런 행동을 했다고 한다.
위에 써 있듯이 일본 활동 당시 등록명이 삼손이었는데, 하필이면 일본 내에서는 삼손이 유명한 
게이 잡지의 이름인지라.. 물론 이상훈 본인이야 그걸 알지는 못했겠지만(...)
여튼 그런 이유로 당시에도 좀 DQN네임 취급을 받았고 아직도 일본 인터넷에서 이름이 특이한
야구선수 하면 꼭 등판하는 추억의 선수이기도 하다. 참고로 삼손은 2017년에도 발행 중이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병역면제를 받았던 사실이 있다고 한다.
아마 생계곤란이 정식 사유인 것으로 보인다.
나이 들어 상남자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데뷔 초에는 꽤 순박하고
앳된 얼굴이었다.

 

이상훈이 95년도에 20승 도전 당시 인터뷰를 보면 그 야생마가 맞나 싶을 정도로 밝고 명랑하다.
국내에서 뛸 때 달았던 등번호 47번은 같은 왼손투수 톰 글래빈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대학 시절 미군 방송에서 톰 글래빈의 투구를 보고 자신도 그렇게 던져야겠다고 마음먹어서
47번을 달았다고 한다. 마해영은 같은 이유로 외야수 조 카터의 49번을 달았다.
47번 이외에 이상훈이 프로 선수로 활동하며 달았던 번호로는 17번(주니치), 40번(보스턴)이 있다.
선호하는 등번호인 47번을 달 수 없어서 비슷한 숫자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주니치에서 같이 뛰던 이종범의 증언에 따르면 주니치 시절에도 숙소에서 매일 기타를 치는 바람에
일본 선수들이 싫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프런트측에서 항상 숙소 옆방을 같은 한국선수인 선동열과 이종범으로 배치해 놨다고 한다.
숙소에서 항상 기타를 치며 주로 높은 음의 락음악 노래를 불러서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는 잠시 축구선수로 뛴 적도 있다.
학교 축구부에서 주전 골키퍼를 했을 정도로 축구 실력도 꽤 좋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 학교 운동장에 야구부가 와서 훈련을 했다 보니 자연스레 야구부원들과 친해졌고,
비슷한 시기에 축구부가 해체되면서 그 뒤로 야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SK의 좌완투수 김광현이 어릴 때는 LG팬이어서 이상훈을 가장 존경하고 좋아했다고 한다.
LG트윈스 영원한 야생마 이상훈 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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