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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나에 지나간시절

LG트윈스 의 영원한 승리에 마무리 김용수투수 기억나시나요?

by mostheri 2022.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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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시리즈 두 번의 MVP 김용수 투수

LG 트윈수의 김용수 투수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모습이 1994년 코리안시리즈 4차전 

9회 말 삼성의 마지막 타자의 공을 잡고 만세를 부르며 1루로 송구 하여 마지막 아웃을 잡고 

우승을 하며 동료들이 일제히 뛰어나와 부둥켜안고 기뻐하던 그 모습이 생각납니다 

그게 벌써 28년 이 지났으니 LG트윈스 구단 선수들 너무하는 거 아니요?

2021년 투수에 비해 타력이 너무 않좋아서 코리안 시리즈에 진출하지도 못했는데 올해는 타격,

공격, 홈런 모두 1위 이긴 한데 SSG에게 페넌트레이스에서 한 번도 1위 자리를 뺐지 못하고 있어서

올해도 우승하고는 인연이없는것인지 하는 불안감도 있습니다

2021년도처럼 9월 이겨야 할 중요한 순간에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올해는 한국시리즈에서

28년 만에 우승을 꿈꿔볼 수가 있는데 9월 마지막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고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은 MBC청룡 입단하여 LG 트윈스에서 KBO 최초로 영구결번 의 승리에 뒷문을 책임지고

한국시리즈 우승 2번과 2번의 MVP 인 김용수 투수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참고로 김용수 투수에 대한 자료는 나무 위키의 자료를 바탕 을로 작성한 것입니다 

♥ KBO 최초로 영구 결번식을 가진 선수 LG트윈스 김용수 투수 

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순간 김용수 투수

"LG 트윈스를 절대 지지않는 팀으로 만드는 것이 나의 할 일이다." ㅡ 야구는 전설이다 LG 김용수 편 

 

前 MBC 청룡, LG 트윈스의 투수. LG의 유일한 한국시리즈 MVP이자 최초의

통산 100승 - 200세이브의 기록을 보유한 프랜차이즈 스타.

자신을 아끼지 않으며 한결같이 한 팀을 지켜 온 모습에서 따 온 '노송'이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하다.

MBC 청룡과 LG 트윈스의 역사를 잇는 산증인인 선수이기도 하다.

때문에 LG팬들이 자체적으로 구입해서 야구장에 입고 오는 청룡 유니폼에는 그의 41번을 달고

오는 경우가 자주 있다.

일찍 야구를 시작했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동대문중학교 1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참고로 본래는 3루수였는데 선발투수 한 명을 새로 뽑아야 하는 상황에서 감독이 김용수의

선배들에게 누가 적합하냐고 물어보자 만장일치로 다 김용수라고 답했다고 한다.

동대문상고와 중앙대학교를 졸업하고 실업 야구팀인 한일은행을 거쳐 1985년 계약금 2,300만 원에

MBC 청룡에 입단했다.

1984년에는 이상군, 선동열, 류중일 등과 함께 LA 올림픽에 참가했다.

LG 트윈스 최초의 영구 결번식을 가진 선수(41번)이며, 한국프로야구에서 최초의

200세이브-100승을 거둔 선수이기도 하다.

이후 김용수 본인이 이에 대한 비화를 공개했는데 본래는 대학시절부터 쓰던 14번을 달려고

본래 주인인 선배투수 이광권에게 번호를 달라 부탁을 했으나 거절당하자, 38번을 선택을

하였지만 당시 김동엽 감독이 번호를 가져가게 되어 나머지 남은 41번을 달게 되었다.

당시 41번으로 결정한 이후 팀 동료들에게 "너 얼마 못하겠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본인도 맘에 들었는지 이광권의 은퇴 이후에도 41번을 계속해서 달았다.

프로 입단 2년째인 1986년 1점대 방어율에 세이브왕을 차지하며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후 87년과 89년에도 세이브 1위를 기록하며 80년대 후반을 대표하는 팀의 마무리로 자리 잡았다.

그러다 팀이 LG로 바뀐 1990년에 정삼흠과 보직을 바꾸어 선발로 전환했는데, 포크볼을 구사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12승을 거둠과 동시에 그해 한국시리즈에서 2승을 혼자 따내 팀을 창단 첫해 우승을 이끌며

MVP를 차지했다.

1991년에도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으나 무리하게 굴려진 여파로 인해 좌골 신경통이 발생하면서

1992년은 은퇴 직전까지 몰리는 부진을 겪게 된다.

그는 선배 박철순의 조언을 받아들여 수술 대신 재활을 선택했고 부상에서 회복된 1993년에 다시

마무리로 복귀하는데, 3년 연속 30세이브를 달성함과 동시에 1994년 한국시리즈에서

1승 2세이브를 기록하며 최초의 2회 한국시리즈 MVP 수상을 달성했다.

다만 이 시기에는 선동열, 정명원, 김경원 등 강력한 마무리들이 등장해서 상대적으로 평가가

낮아지기도 했다.

1995년 6월 14일 잠실 OB전에 10회말 2사 2루에서 타석에 들어섰고 삼진으로 물러났다.

1996년부터는 혹사와 척추분리증으로 선발이 힘들었던 이상훈을 대신해 선발로 돌아와서

성공적인 선발 복귀를 했으나, 다음 해 마무리로 다시 돌아갈 예정이었음에도 김용수가

신임 감독이던 천보성에게 우겨서 쭉 선발로 뛰면서 이상훈은 97년에도 마무리로 뛰게 된다.

대신 이상훈 부럽지 않은 활약으로 매년 12승 이상을 해 주었고, 1998년에는 18승으로 다승왕을

기록하며 최고령 다승왕이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2시즌 동안에도 노장의 관록을 보여주며 2000년에 은퇴를 선언했다.

KBO 최초로 영구 결번식을 가진 선수지만, 은퇴식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은퇴식을 본인과 구단 모두 원하지 않았고, 은퇴 당시에는 선수 생활을 더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고 한다.

실제로 현역 생활을 한 마지막 해인 2000년에는 마무리 자리를 장문석에게 넘겨줘서 기록으로만

따졌을 때는 6승 4패 4세이브에 방어율 5.24였지만, 소화한 이닝은 무려 127이닝이었다.

이광은 당시 감독과LG 구단이 등 떠밀듯이 은퇴만 시키지 않았으면 마무리로서는 아닐지라도

중간계투 투수로 몇 년 더 뛰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KBO 리그 역사적으로 본다면 최초로 '1이닝 클로저'라는 보직을 확립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전에 마무리라는 개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김용수에 앞서 최초의 전문 마무리 역할을

한 권영호도 있었다.

하지만 권영호의 경우는 7회부터 구원 등판하는 경우도 잦았으므로 어떻게 보면 불펜 투수로서

보는 시각도 존재하기도 한다.

김용수도 이광환이 부임한 1992년 이전에는 2, 3이닝 이상도 던지는 고전적 의미의 마무리

역할이었다.

1이닝 클로저의 역할은 이광환이 LG의 투수 운용시스템에 중간계투에 역할을 부여하는 분업체계를

도입하면서 확립되었고1991년, 백인천 말기 선발-중간-마무리를 가리지 않는 무리한 등판으로

지병이 되어 버린 좌골 신경통을 얻은 그가 다시 마무리 투수로서 재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김용수 은퇴 무렵의 인터뷰 기사를 보면 자신의 투구 이닝을 철저하게 관리해서 재기할 수 있게

해 준 이광환 감독에게 감사의 뜻을 표한 내용도 있다.

이러한 1이닝 클로저라는 역할의 확립으로 인해 LG는 흔히 말하는 리드를 빼앗기면 뒤집기 힘든

팀으로 거듭날 수 있었고, 이를 많은 팀들이 모방, 그 후로 선발-중간계투-마무리라는 체계가

다져지게 된다.

하지만 도입초기에는 2~3이닝을 책임지면서 시즌 규정투구 이닝을 채우는 경우도 다반사였던

고전적 마무리에 익숙해 있던 대한민국의 야구팬들에게 매우 생소하게 비쳤으며, 9회 1이닝만

던지고 세이브 숫자를 쌓아올리는 모습을 보면서 김용수의 임무를 아주 편안한 임무로

생각하기도 했다.

당시의 LG까들이 김용수를 깔 때 가장 많이 하던 말이 '김용수는 1이닝만 던지고 편하게 세이브를

챙긴다'였다. 하지만 이 역할이 얼마나 어려운 역할인지는 그 후의 세계 프로야구의 흐름을 보면

명약관화. 또 은퇴한 후 2012년까지, 즉 12년 동안이나 그가 보유한 통산 세이브의 기록은 깨지지

않았다. 그동안 수많은 후배들이, 때로는 1년에 40~50세이브씩 거두면서 5~6년 안에 그의 기록을

넘어설 수 있을 것처럼 보였지만 한국에서 통산 200세이브를 거둔 투수는 2012년 시즌 후를

기준으로 그를 제외하면 구대성과 오승환, 임창용밖에 없다.

물론 구대성과 임창용은 중간에 5년간 해외리그에서 외도를 한 탓도 있지만, 김용수도 때로는

팀의 필요에 의해 선발로 전향할 수 밖에 없었던 시기(1990~1992년, 1997~1998년)도 있었고,

대졸에 LA 올림픽 참가를 위하여 실업 야구팀인 한일은행에서 뛴 탓에 실질적인 KBO 데뷔 시

전에

사실들도 고려해야 할 듯.

그의 기록에 도전했던 수많은 도전자들이 3~4년 화려하게 불태우면서 기록에 접근하지만 그

뒤로는 부상과 부진 등으로 5년에 10세이브도 추가하지 못하면서 은퇴하게 되는 상황이 반복되고,

FA 도입으로 선수들의 해외진출이 자유로워지면서 김용수의 저주라고 불리기도 하며 몇십 년간은

깨지지 않을 기록으로 남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하지만 결국 오승환이 2012년 7월 1일자로 개인 통산 228세이브를 거둬 통산 세이브 기록을

갈아치우며 12년간 변하지 않던 통산 최다 세이브 기록은 다시 쓰이게 되었다.

이리하여 통산 세이브 기록은 오승환에게 넘겨주고 2위로 내려앉았다.

하지만 통산 세이브 1~2위였던 오승환과 임창용이 불법 도박에 연루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다른

의미로 저주에 걸려버렸다.

허나 김용수의 100승 - 200세이브는 선발-중간-마무리로 분업된 현대 야구의 특성상 앞으로 나오기

힘든 대기록은 틀림없다.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면서 선발로는 기본 10승 정도는 해줬으며, 마무리로는 최소 20세이브 이상을

꾸준히 해온 결과 그런 대기록을 만들 수 있었다.

선발 투수의 덕목인 완급조절, 지구력, 경기 운영과 마무리 투수의 덕목인 배짱, 집중력을 두루 갖춘

흔치 않은 유형의 투수였던 것. 이것만 봐도 김용수가 얼마나 대단한 투수였는지 그대로 말해준다.

♥ LG트윈스 김용수 투수 기록

1. 1985년 MBC 청룡 소속으로 데뷔.(6경기 1승 2패 2세이브) 경기 도중 타구에 무릎을 맞는
    중상으로 시즌 종료.
2. 1986년 구원 1위 (35SP).
3. 1987년 구원 1위 (33SP). 통산 100경기 출장(8.15 잠실 OB전).
4. 1989년 구원 1위 (26SP).
5. 1990년 선발 전향 성공(33경기 12승 5패 5세이브).
6. 1991년 통산 100세이브(8.10 잠실 OB전).
7. 1992년 부상(좌골 신경통) 후유증으로 부진.(14경기 5승 4패)
8. 1993년 마무리 복귀.(구원 2위, 32SP, 50경기 6승 2패 26세이브)
9. 투수 최초 300경기 출장(5.26 잠실 OB전).
10. 1994년 통산 150세이브(7.28 태평양전). 통산 200세이브 포인트(9.23 삼성전).
11. 1995년 2년 연속 30세이브 투수 최초 400경기출전(6.25 쌍방울전).
12. 1996년 선발·마무리 겸직. 통산 250세이브 포인트(6.6 잠실 롯데전), 전구단 상대 승리
       (8.6 롯데전, 시즌 3번째).
13. 1997년 프로투수 최초 투수 500경기 출전 및 97시즌 4호 전구단 상대 승리(잠실 해태전).
14. 1998년 개인통산 100승 달성(4.22 잠실 쌍방울전 달성).
15. 3년 연속 전구단 상대 승리(9.2 잠실 롯데전 달성).
16. 1998년 역대 최고령 다승왕 기록 달성(18승, 당시 38세)
17. 통산 1천탈삼진 달성(9.11 잠실 쌍방울전). 시즌 다승 및 승률 1위 (18승, 0.750).
18. 1999년 통산 200세이브(4.15 인천 현대전). 통산 100승 200세이브는 국내 최초이자일본에도
       기록이 없고 미국에서도 4명뿐인 진기록.
19. 국내 최초 영구 결번식을 치룸(4.19 잠실 한화전).
20. 2000년 투수 최초 통산 600경기 출장(7.15 잠실 한화전).
21. 포스트시즌 통산 최다 경기 출장(28경기).
22. 통산 613경기에 등판.
23. 126승 89패 227세이브(방어율 2.98) 1146삼진 기록.

★LG트윈스 김용수 투수 수상내역

   한국시리즈 우승 2회 (1990, 1994)

   한국시리즈 MVP 2회 (1990, 1994)

   승리 1위 (1998) 승률 1위 (1998)

   구원왕 3회 (1986, 1987, 1989)

♥ LG트윈스 김용수 투수 후계자가 될 고우석 투수

지금 현재 LG 트윈스에는 2019년 21세 1개월 7일의 나이로 30세이브 를 이루어 최연소 30세이브 를

이룬 임창용의 종전 최연소 의 기록을 경신한 김용수 투수를 이어갈 고우석 투수가 있습니다 

2022년 현제 31세이브를 달성하여 세이브 부분 1위를 기록하고 있어 2006년 오승환이 기록한 최연소

40세이브 기록(오승환 24세 1개월 26일)에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고우석 아직 나이가어려서 앞으로의 일을 모르겠지만 FA 자격이 되더라도 LG에 계속 남아서

영원한 LG 맨이 된다면 오승환의 개인통산 228세이브를 경신하여 LG의 세이브 왕 타이틀을 계승할 것

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2022년 현제 세이브 1위 LG고우석 투수

2022년 28년 전의 영광을 위하여 LG 트윈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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