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구선수와 감독 야구인 백인천 님
지금의 LG 트윈스 팬들은 잘 모르겠지만 386세대의 서울 LG팬이라면 야구인 백인천 님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듯합니다
40년 프로야구 사상 감독과 선수를 한 분이 백인천님이요 타울 4할대를 기록한 분이
오직 백인천님 뿐입니다 이기록이 반드시 깨져야겠지만 그게 그렇게 쉽지 않을 거 같습니다
2022년 LG트위스가 28년 만에 꼭 우승하기를 바라며 시작한 LG 야구의 역사를 포스팅하면서
절대로 빼놓아서는 안될 분이기에 포스팅을 하며 1982년시작한 프로야구에서 LG의 역사뿐만
아니라 위대한 선수 감독에 대한 포스팅도 같이 할려고 합니다 인터넷에 의한 기록을 위주로
할 예정이니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 야구인 백인천
백인천 은 1943년 11월27일 생이며 대한민국의 전직 야구 선수이자 야구 감독이자,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유일한 선수 겸 감독을 맡은 인물.
오랜 기간 SBS Sports의 일본프로야구 담당 해설자로 활동했다.
현역 시절 포지션은 포수와 외야수.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한국 야구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 중 하나로, 매우
오랜 기간 동안 선수, 감독 등을 맡아 여러 팀을 거치며 굵직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경동고 시절 야구선수로 뛰는 와중에 스피드 스케이트 선수로도 활동했고, 1961년 500m
고등부 대회를 싹쓸이한 경력이 있을 정도로 출중한 실력을 보유한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야구선수로서의 능력은 더욱 뛰어나서 학창시절 "원자탄 투수" 이재환과 함께 배터리를 이루며
경동고를 당대 고교야구 최강으로 이끈 주역이었으며, 특히 1960년 한해 경동고의 성적은 무려
32승 2무로 그야말로 초고교급 야구팀이었고 백인천이야 말로 그 경동고의 핵심 선수였던 것이다.
1959년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했고, 1960년 6월에는 서울운동장 야구장이 개장한 이래 고등학생
으로는 처음으로 홈런을 기록한 적도 있고, 그해 10월 일본 원정경기 때 메이지 진구 구장에서도
홈런을 기록했는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고교생이 진구 구장에서 기록한 2번째 홈런이었다.
또한 1962년 1월, 타이완에서 열린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최종일 필리핀과의 경기에서도 비바람을
뚫고 타이베이 송산구장 개장 이래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홈런을 날리기도 했다.
경동고 졸업 후 농협 야구단에서 활약했으며, 국제대회에서 보여준 뛰어난 활약으로 몇 번이나
일본프로야구에서 스카웃 제의가 있었지만 당시 강하게 남아있는 반일감정 등의 이유로 번번히
무산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타이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준우승을 치하하기 위해 대한체육회에서
개최한 환영회에 선수단이 참석했는데 당시 대한체육회장이자 박정희 군사정권의 실세이던
이주일 준장이 연회 도중 백인천에게 야구하면서 애로사항이 없느냐라고 묻자 기다렸다는 듯이
"일본으로 가고 싶은데 좀 도와주십쇼!!"라고 당돌하게 답했다.
사실 백인천은 선수권을 마치고 타이완을 떠나 일본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기다리던 중에,
한 재일교포 야구인의 주선으로 도에이 플라이어즈의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과 구단 관계자를 만나
가계약을 맺은 상태였다.
이에 당시 야구협회장이 펄펄 뛰며 반대하자 이 준장은 오히려 "이런 젊고 훌륭한 선수가 해외로
나가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면서 신문에 여론조사까지 의뢰했고, 결과는 80%의 국민이 백인천의
일본 진출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왔다.
결국 백인천은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하지 않고 나중에 돌아와 병역의무를 완수한다는 조건 하에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 일본 에서의 선수생활
개명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고 일본 무대에 진출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의 유니폼에는
BAEK이 아닌 HAKU라고 적혀있었다.
그 덕에 영문으로 된 일본프로야구 관련 자료에 Jinten Haku라고 나와 있는 경우가 많다.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는데 그 시절엔 일본에서 뛴 대한민국 선수의 이름을 다 이런
식으로 읽었었다.
애시당초 Jinten Haku가 백인천(白의 한자를 일본식으로 읽은 것을 서양식으로 성과 이름을
뒤집은 것이다.
사실 그 시절에는 우리나라도 이토 히로부미를 우리식 발음인 이등박문으로, 장제스를
장개석으로 읽는 일이 흔했다.
한자의 일본 발음을 따르지 않은 한국 선수는 선동열이 처음이다. 일본어는 19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동북아시아 한자문화권 지역 출신의 인명표기를 일본어 음독으로 표기했다.
당장 선동열보다 오래이며 1950년대 후반에 일본으로 데뷔해서 대활약 했던 일본 출생
대만 국적 선수로의 왕전즈(王貞治, 왕정치)를 오 사다하루로 불렸고 유니폼에 OH로 표기하였으며,
선동열보다 조금 더 앞서 1980년대 중반 ~ 후반에 일본으로 데뷔해서 맹활약 했던 대만 출생
대만 국적 선수로의 궈위안즈(郭源治, 곽원치), 궈타이위엔(郭泰源, 곽태원), 좡성슝(荘勝雄, 장승웅),
궈리젠푸(郭李建夫, 곽리건부), 뤼밍츠(呂明賜, 여명사) 등도 일본에서는 각각 카쿠 겐지
(이후 일본 국적으로 귀화), 카쿠 타이겐, 소 카츠오(이후 일본 국적으로 귀화), 카쿠리 타테오,
로 메이시 등 일본식 음독으로 불렸으며 유니폼에도 곽(郭), 장(荘), 곽이(郭李)의 중국어 발음인
KUO, CHUANG, KUOLEE가 아니라 일본식 음독인 KAKU, SOH, KAKURI로 표기됐다.
대만 출신으로서 일본에서 중국어 발음으로 선수 등록이 이루어진 것은 선동열보다 조금 뒤에
데뷔한 쉬밍제(許明傑, 허명걸)에 이르러서 였고, 유니폼에도 성인 허(許)의 일본식 한자독음인
KYO보다 중국발음인 HSU로 표기 했다.
이는 한어병음방안이 아닌 웨이드식 표기이다.
즉, 이는 백인천 만의 문제는 아니었다는 얘기다.
이상훈의 경우는 별명을 반영하여 SAMSON LEE, 김태균의 경우로는 TAEKYUN으로 적혔다.
다시 말하면 동아시아권 선수 이름의 원어발음 존중 표기법의 효시가 선동열이었던 셈이다.
입단 초기엔 말이 안 통하는 외국인에게는 가혹한 포지션인 포수로 플레이했는데, 항상 일본어
사전을 손에서 놓지 않으며 투수와의 의사소통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1963년 시즌 중반 주전 포수들의 부상으로 인해 1군으로 올라와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 눈에
들며 주전 포수자리를 꿰차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65년 시즌 후반부터는 빠른 발과 강한 어깨를 살리기 위해 외야수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당시 2군에서 백인천이 가끔 외야수로 뛰면서 좋은 플레이를 보이자 2군 감독이 미즈하라에게
외야수 전환을 건의했는데 처음에 미즈하라는 "발 빠른 포수가 어디 흔한 줄 아느냐"라며
일축했으나, 그 해 난카이 호크스와의 경기 도중 장훈이 부상으로 빠지자 백인천이 백업 좌익수로
교체 투입되었고 시기 적절하게 까다로운 안타성 타구를 다이빙 캐치하는 파인 플레이를 시전했다.
이는 포수로 뛰면서 분석해 두었던 당시 타석에 있던 상대방 선수의 타격 스타일과 타구 방향 등을
염두에 두고 미리 공이 떨어질 만한 위치에 이동해 있었는데 그 예측이 적중한 것이었다.
결국 미즈하라 감독도 "오늘부터 외야수를 하라."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 이후 백인천은 주로 중견수로 뛰면서 타자로서의 재능을 더욱 꽃피우게 되었다.
실제로 이와 같은 이유로 포수 출신 외야수가 많다.
백인천이 중견수를 볼 때 좌익수는 주로 절친한 선배인 장훈이 맡았는데, 백인천은 빠른 발과
넓은 수비범위, 포수를 보던 강견을 바탕으로 리그 정상급의 외야수비를 자랑한 반면, 장훈은
백인천 못지않게 발은 빨랐지만 어릴 적 입은 화상으로 불편한 오른손과 고등학교 시절 부상으로
약해진 어깨 때문에 수비는 영 자신이 없었던지라 좌중간을 향해 날아오는 타구는 으레
백인천만 바라보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때마다 백인천은 먼 거리를 헐레벌떡 뛰어와 타구를 잡아낸 적이 한두 번이 아닐 정도였다.
그래서 어느 날 백인천은 이를 참지 못했는지 웃으면서 장훈에게 "장이형, 형 연봉 중에 수비 몫은
나한테 줘요."라고 농을 걸자 장훈은 백인천을 장난스레 쥐어박으며
"임마, 너 수비연습 시켜준 건 생각 안해?"라면서 서로 껄껄댔다는 에피소드도 있다고.
참고로 백인천은 장훈과 친해서인지 장이형이라고 불렀다.
한국인 선수인지라 투수에게 종종 빈볼성 공을 맞기도 하고 심판 판정에 있어 불리한 점도 많았다.
대표적인 예로 1970년 5월 23일 킨테츠 버팔로즈와의 시합 때 주심이었던 전직 권투선수
출신 심판 츠유자키 모토야가 존에서 한참 벗어난 투구를 스트라이크로 판정하며 백인천에게
삼진을 선고했고, 이에 발끈한 백인천이 츠유자키에게 이게 왜 삼진이냐고 버럭대자 츠유자키는
"심판이 삼진이라면 삼진이지 말이 많다"라며 조롱하는 투로 들이댔다.
이에 화가 폭발한 백인천은 츠유자키의 죽빵을 날리는 바람에 퇴장 처분을 받았고, 이 사건은 지금도
퍼시픽리그의 명장면으로 꼽힐 정도다.
이후 백인천은 츠유자키에게 폭행죄로 고소당했지만 며칠 후 서로 화해하고 소를 취하하면서
무혐의 처리되었다.
또한 자신에게 빈볼을 던진 투수는 세이프티 번트를 시도하면서 1루에 커버 플레이를 들어오는
그 투수의 발을 스파이크 날로 밟아버릴 정도로 보복은 반드시 하는 파이터 기질도 있었다.
한편으로 팀 선배인 장훈의 후광도 있었고 소속된 파벌 자체가 일본프로야구계의 성골이라고 할 수
있는 미즈하라 시게루 계열이었기 때문에 한국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인간 관계에서 크게 손해본 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미즈하라가 토에이 감독으로 재임하던 시절에는(1962~1967) 트레이드를 거부할 만한
힘까지 있을 정도였다.
1975년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즈에 히가시다 마사요시를 상대로 트레이드로 이적하였고,
히가시오 오사무(東尾修), 도이 마사히로(土井正博), 가토 하지메(加藤初, 前 SK 와이번스 투수코치)
등과 함께 팀의 간판으로 활약하며 0.319로 타격왕을 차지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해 라이온즈는 타격왕 백인천, 홈런왕 도이 마사히로, 다승왕 히가시오 오사무를
배출했음에도 리그 우승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이 해의 타격왕 경쟁은 상당히 치열했는데 백인천과 타격왕 타이틀을 놓고 경쟁했던 상대는
공교롭게도 백인천을 트레이드시킨 전 소속팀 닛폰햄 파이터즈의 오다 요시토였다.
자신을 버린 전 소속팀에 대한 앙갚음이라고 생각했는지 세이프티 번트까지 동원하면서 타격왕
경쟁에서 물러나지 않았고, 시즌 마지막 경기에 딱 규정타석을 채워서 5모(0.0005) 차이로
극적으로 수위타자 타이틀을 따냈다.
이 타이틀 경쟁이 자신을 버린 전 소속팀에 대한 극적인 복수로 인식되면서 당시 상당히 임팩트가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백인천이 라이온즈에 활약한 것은 불과 2년밖에 안 됨에도 불구하고 당시
팀의 응원가 우리들의 우상 라이온즈(僕らの憧れライオンズ)의 가사에 나오는 선수들 중에서
백인천의 이름이 언급될 정도이고 세이부 라이온즈에서 전신 구단인 다이헤이요 시절 스타들을
초청해 팬미팅을 가질 때 백인천도 직접 참석했다.
1976년 오프시즌에 팀 동료 야스키 쇼지와 같이 하세가와 카즈오, 쿠라모치 아키라 를 상대로
트레이드 되고 롯데 오리온즈로 이적하며 1980년 시즌까지 롯데 소속으로 활약했고, 1981년
긴테쓰 버팔로즈로 이적하여 1년간 활동하고 이듬해인 1982년에 한국 프로 야구가 출범하게 되었고,
한국에서 활동하고 싶었던 그는 일본에서의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한국으로 귀국하며 무대를
옮기게 된다.
일본프로야구 통산 1,969경기에 출장하여 1,831안타, 209홈런, 212도루를 기록했다.
현재 이 기록은 명구회 가입 조건인 2,000안타, 200홈런에 가장 가까운 기록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에서 기록한 135안타를 더한다고 해도 2,000안타가 되지 않는다.
2006년 WBC 이후부터는 일본에서도 대한민국에서 세운 기록을 인정해 주는 게 일반적이다.
그래서 이승엽의 한일 통산 400호 홈런도 방송에서 직접 언급을 했었다.
만약 귀국하지 않았다면 2,000경기 출장은 확실히 이루었을 것이 분명한 바, 영광 대신 조국을
선택한 선수 백인천을 무조건 비난하기는 어렵다고 볼 수 있다.
♥ 한국에서의 감독겸 선수생활
40대가 되어 모국으로 돌아온 백인천은 첫 경기부터 방망이가 불을 뿜었다.
백인천은 프로 원년 개막전인 1982년 3월 27일 동대문 삼성전에 5번 지명타자로 선발 출장해
6회말 추격의 중월 솔로 홈런을 치면서 팀 승리의 기반을 마련했고 연장 10회말 고의사구로
걸어나간 후 이종도의 끝내기 만루홈런 때 홈을 밟았다.
경기 종료 후 그는 방송 인터뷰 때 일본프로야구 선수 시절 당했던 멸시와 서러움이 생각났는지
연신 눈물을 흘렸다.
이때 극적인 역전승에 감격한 팬들이 경기장에 난입해 눈물의 인터뷰를 하는 백인천을 둘러싸고
티비에 출연했다고 좋아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혀 프로야구 역대 레전드 인터뷰로 회자되고 있다.
1982년 원년 시즌에 타율 0.412(72경기 250타수 103안타 )를 기록하게 되는데, 이 타율은 당연히
한국프로야구 단일시즌 최고타율이자 KBO 역사상 유일무이의 4할 타자이다.
일본프로야구에서도 4할을 친 선수는 없고 일본프로야구 최고 타율 기록은 1986년
한신 타이거즈의 랜디 바스가 기록한 0.389이다.
미국에서도 1941년에 테드 윌리엄스가 4할을 친 이후로는 4할타자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장타율 또한 0.740로서 2015년 에릭 테임즈에 의해 깨지기 전까지 33년 동안 1위를 유지하였다.
원년에는 타자가 본업인 해태 김성한이 투수로 나와서 10승 방어율 2점대를 기록할 정도로
원년은 아직 실업야구의 티를 벗지 못했던 시절이고, OB의 에이스 박철순이
224이닝(80경기중 36경기)을 던질 정도로 선수층이 빈약했기에 나이 들고 한국에 와서도
4할이 가능했던 것이였다.
출루율 역시 0.502로 2001년 펠릭스 호세가 0.503으로 기록을 갈아치우기 전까지 역대 1위는
이 시즌 백인천의 몫이었다.
결과적으로 백인천의 82년 타율/출루율/장타율은 KBO 리그 한 시즌에 나오기 힘든 전설적인 수치다.
타출장 4/5/7 괴물같은 슬래쉬 라인더불어 안타와 득점에서 1위, 홈런과 타점은 2위였다.
도루도 11개를 기록하면서 호타준족 이미지까지 있었다.
하지만 MVP는 OB의 박철순이 수상했다. 원년 팀당 경기수가 고작 80경기로 적었던데다 선수
겸 감독으로서 스스로 기록관리를 했기 때문에 4할타율의 가치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하는 일부의
주장이 있다. 이에 대해선 반박이 존재한다.
80경기가 적긴 했어도, 80경기 시즌이라고 딱 잘라서 KBO 리그를 볼 경우 백인천을 제외하고
4할을 치고 있었던 것은 1994년의 이종범(104경기)과 2012년의 김태균(89경기) 단 두명 뿐이다.
기록관리를 했다는 주장에 대한 김은식 기자의 반박을 보자.
그리고 백인천의 기록을 폄하하려는 사람들은 그가 상대팀의 에이스 투수가 나올 경기는 일부러
결장한 듯이 주장하지만, 백인천은 그해 한 팀이 소화하는 80경기 중 8경기에 결장했는데,
그중 5경기는 몰수게임에 따른 출장정지이므로 그가 자발적으로 빠진 경기는 3경기뿐이다.
감독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어려운 투수가 나오면 결장할 수도 있었음에도 거의 전경기 가깝게
출전했다고 봐야한다.
게다가 출장정지 받은 5경기 중엔 투수진이 붕괴된 최약체팀 삼미 슈퍼스타즈의 시리즈도 있었다.
오심이 없었거나, 몰수패 경기까지만 끌고 가지 않았어도 오히려 삼미 등을 통해 타율을
더 올릴수도 있던 상황. 본인은 4할에 대해 신경도 안썼다고 한다.
마지막 경기 때 코치가 타율이 4할이니 오늘 경기는 쉬고 다른 선수를 내보내자고 하자 백인천은
자기는 4할 신경도 안쓴다고 말을 했다고 한다.
기록관리설 정리 일본시절에 3할을 넘긴 시즌이 딱 3번, 장타율 5할을 넘긴 시즌도 3번, 출루율
3할5푼을 넘긴 시즌이 2번에 불과한 선수가 한국에 와서 39세에 타율 0.412를 치고 장타율 0.740을
넘겼다는 것은 분명히 KBO 리그 초창기에서나 가능한 이례적인 기록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백인천이 일본에서 그저그런 선수였다고 볼 수는 없다. 통산 타율 0.278, OPS가 0.746
통산 홈런 209개 통산 도루 212개를 기록한 그는 일본에서도 상위급 선수였다.
특히 호타준족의 상징인 통산 200홈런 200도루 클럽에 가입해서 이름을 확실히 남겼다.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현재(2018년 3월)까지 200-200 클럽 가입자는 17명에 불과하다
(그 중 이치로와 마쓰이 가즈오는 MLB에서의 기록을 합쳐야만 가입하게 된다.).
다만 일본 시절엔 단 1번도 20홈런을 넘긴 적이 없어서 파워형 선수라고 보기엔 확실히 무리고,
출루율이 통산 0.316으로 0.276의 높은 통산타율 치곤 다소 낮았는데, 이유는 통산 379사사구/471삼진
기록에서 보듯 배드볼 히터에 가까운 플레이를 보였기 때문. 실제로 일본 시절엔 40사사구/40삼진을
단 1번도 넘긴 적이 없다.
즉 선구안이 나빴다고 보긴 힘들지만 사사구를 얻어 출루하는 것보단 공을 치고 나가는 걸
선호한 컨택 위주의 선수라고 할 수 있다.
이 조건에 거의 완전히 부합하는 선수는 박용택이라고 볼 수 있는데, 통산 200-300의 대기록을
세웠지만 정작 한번도 20홈런을 찍은 적이 없고, 선구안은 무난하지만 배드볼 히터 유형에
가까워서 볼넷이나 출루율이 크게 높은 선수도 아니라는 게 공통점.
다만 백인천보다는 평균 타율이 높고, 볼넷이나 삼진 개수도 백인천보다는 많았다.
게다가 한국에 올 때 만 39세였으니 그의 전성기인 30대 초중반에 한국에 왔다면
아예 초토화시켰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리그 수준이 낮다고 해서 그의 기록을 폄하하면서 당시 그의 나이는 고려하지 않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4할 기록을 폄하하기 위해 '만약에 리그 수준이 높았다면'이라는 전제를 하려면
'만약 그의 전성기 때 KBO 리그가 창설되었다면'이라는 전제도 이야기해보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어찌되었든 4할 타율의 기록은 대단한 것이어서 그가 나중에 백골퍼라는
조롱을 듣게되자 MBC팬들이 불편한 감정을 표현하기도 한다.
♥ LG트윈스 의 칭단과 창단우승을 이뤄낸 명감독 백인천
현역에서 물러난 백인천은 골프용품 관련 사업을 벌이며 야구계와는 잠시 거리를 두고 있다가
1990년, 배성서 감독의 후임으로 MBC 청룡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야구계로 돌아오게 된다.
이후 청룡이 럭키금성그룹에 매각되며 LG 트윈스로 개명해 LG의 창단 감독이 된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MBC의 시작과 마지막을 장식하고, 동시에 LG의 시대를 연 감독이었던 셈.
1989년 시즌 당시 청룡은 선수진 개개인은 나무랄 데 없었지만, 팀웍 부재로 그해 내내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백인천은 모래알 같던 팀웍을 재건하여 단 1년만에, 만년 꼴찌였던 팀을
페넌트레이스 - 한국시리즈 통합 우승팀으로 만들며 지도자로서 화려하게 부활하게 된다.
MBC청룡과LG트윈스에서 큰 발자국을 남긴 백인천 감독님 지금은 두번째로 우승할 당시 선수로
뛰었던 유지현 감독이 LG트윈스 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올해는 꼭 ! 반듯이 우승하여 28년을 기다려온
원년 서울 팬들에게 즐거움을 줄수있는 한해가 되기를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LG 트윈스 화이팅!
https://mostheri.tistory.com/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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