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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나에 지나간시절

1976년 8월18일 판문점 북한 도끼만행사건 을 기억하시나요?

by mostheri 2022.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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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의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70년대 말 미국의 카터 대통령이 취임 후 주한미군 철수라는 공약으로 인해 박정희 대통령과

미국과의 관계가 그다지 좋지 않았을 때 더위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판문점에서는 비류 나무

가지치기를 하던 미군이 북한군에 의해 도끼질로 두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그 당시 제가 중학교 2학년 때인데 사건 이후 곧 전쟁이 날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다행히 전쟁을

일어나지 않고 국민들이 연일 규탄대회를 하며" 미친개는 몽둥이로" 라는 구호가 등장하는 등

7.4 남북 공동성명으로 그나마 조금 좋아졌던 북한에 대한 국민의 감정은 극에 달하였고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를 통해 대한민국 육군 특수전사령부 제1공수특전여단 대원들로 이루어진

64명의 결사를 조직하고 1 공수특전여단의 지역대장이었던 김종헌 소령이 이 결사대의 지휘관을

맡았습니다. 이 결사대가 해당 작전 지역에 투입되어 미루나무를 절단하는 미 육군 공병들을

엄호하고, 육군 제1보병사단 수색대는 그 일대에 매복하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보복작전이

수행됐습니다.

특전사 결사대원들은 카투사로 위장, 권총과 수류탄은 전투복 속에 숨기고, 크레모아, 

M79 유탄발사기 등은 삽, 곡괭이 등 작업도구 밑에 감추는 식으로 트럭에 탑승하여 공동경비구역

에 들어가 도끼와 몽둥이를 가지고 북한군 초소 4개를 파괴하였습니다.

대원들이 초소에 접근해 손에 도끼와 소총을 들고 활보하며 초소를 난장판으로 만들자, 북한군은

모조리 도망쳤습니다.

간간이 나타난 북한군은 독이 오른 특전사 대원들이 위협을 하며 욕을 퍼붓자 그대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당시 매복 작전을 수행 중이던 1사단 수색대원은 훗날 인터뷰에서 이러다 정말 일이 나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살벌한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특전사 결사대는 북한군이 특전사의 공격에 대해 무력 대응을 할 경우엔 북한군들을 과감히

사살한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다만 먼저 북한군을 사살하지는 말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고 즉, 북한군을 구타하고 깽판을

놓다가 북한군이 발포하면 바로 응사해서 사살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북한군에게 선제공격을 당하는 대원들은 전사하게 될 것이므로 그야말로 죽음을 각오한

결사 조로서의 투입인 것입니다.

실제로 출동 직전에 유서와 손톱 등을 남겼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군이 처음부터 저항

없이 무조건 도망가기만 해서 교전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작전에 투입된 1 공수 대원 증언에 따르면 유서 작성, 손톱과 머리카락을 잘라서 남겼고,

출동 전까지 외출 외박이 금지된 채 영내 대기를 하였습니다.

초소를 부술 때 북한군 초소 병력들은 도주를 했지만, 곧이어 소총으로 무장한 병력들이 분계선을

따라 도열하여 대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발포 등의 공격은 없었고 모든 초소를 파괴하는 걸 구경만 하였습니다.

특전사 대원의 증언에 따르면 무표정한 북한군 무장 군인들의 표정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초소를 파괴하는 동안 나머지 특전사 대원들도 소총으로 무장하고 북한군 출동 병력과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1 공수여단에는 19대 대통령인 문재인이 특전병으로 복무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문재인은 현장에 투입된 결사대는 아니고, 부대에서 행정업무를 소화하는 작전상황팀

소속이었다고.

 

우발적인 사고였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 당시 북한 주석인 김일성이 대한민국과 미국 과의

관계가 좋지 않은 점을 한번 시험해 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1976년 당시 대한민국의 국방력이 자주국방 정도가 아니었고 경제력 또한 북한과 비슷한 상태

이어서 북한이 전쟁을 일으키면 결과를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생각이 들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진 상태라고 저는 생각을 하고 지금 철 모르는 김정은이 핵실험을 다시 하고,

미사일을 수시로 발사 연습을 하고 있지만 제 생각에 북한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향해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라고 할 수 있고 김정은 이나 북한 고위층이 잘 먹고

편안하게 살고 있으면서 자신들이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은 초등학생이 생각을 해도

하지 않을 짓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전쟁은 무기와 군대만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전쟁을 일으키는 나라는 상대국보다

경제력이 최소 2배 이상 되어야 승산이 있는 것인데 지금의 북한이 대한민국에게 전쟁을

시도한다는 것은...

다만 아쉬운 것은 인도, 파키스탄이 굶어 죽어도 핵무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핵무기

보유국이 된 것처럼 박정희 대통령이 그렇게 원했던 핵무기를 완성하지 못하고 서거하신 게 매우

안탑깝게 생각합니다 물론이 미국이 만들지 못하게 했겠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박정희 대통령

은 그 뜻을 접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대한민국이 핵보유국이었다면 북한이 저렇게 철없이 행동을 할까요?

지금 만약 한반도에서 전쟁이 난다고 하면 대한민국이 이길 수는 있겠지만 엄청난 피해로 전후

복구를 한다면 매우 긴 시간이 필요하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어 어린애에게 혼내고 달래주면서

스스로 자멸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됩니다 

제 아버님 고향은 평안남도 안주군 안주읍 장흥리 64번지입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 제 생각에 

제 생전에는 통일이 되어 아버님 유골을 아버님 고향에 모실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전쟁이 없는 평화통일이 오기를 기원합니다 

♥ 북한의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개요

당시 판문점은 물리적인 군사분계선이 존재하지 않는 단어 그대로의 공동경비구역이었는데, 

유엔군 측 3 초소(CP 3)는 조선인민군 육군 초소 3개소(KPA 4, KPA 5, KPA 8)에 포위당한 지점에서

항상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래서 가장 고지대에 위치한 5 초소(OP 5) 측에서 3 초소를 지켜보고 있어야 했는데, 이 문제의 

미루나무가 5 초소의 시야를 방해하고 있었다.

8월 3일 주한 UN군[8] 경비대 작업반은 3 초소의 안전 도모를 위해 미루나무를 자를 것을 권고했다.

이에 8월 6일 한국인 노무자 4명과 UN군 4명이 미루나무 절단을 시도했는데 북한군이 이의를

제기하면서 작업을 중단시켰다.

그러자 경비대는 8월 18일 절단이 아닌 가지치기만 하기로 결정하고, 오전 10시 30분 한국인

노무자 5명을 동원하여 가지치기 작업에 들어갔으며 경비대 중대장 아서 보니파스 대위,

소대장 마크 배럿 중위 등 UN군 장교 2명 및 병사 4명, 국군 장교 1명 및 병사 4명 등 총 11명의

병사들이 작업 감독에 나섰다.

그러자 북한군 군관 2명과 하전사 8명이 나타나 재차 항의했다.

이에 UN군은 가지치기 작업을 하는 중이라 설명했고, 이때 현장에 있던 북한군도 수긍하여

가지치기를 하는 노무자들에게 가지를 잘 치는 법에 대해 조언을 하는 등 작업은 매우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그런데 10시 47분에서 50분 사이, 박철 중위 등 북한군 장교 2명이 15명의 병력을 이끌고 현장에

나타났고 박철 중위는 보니파스 대위에게 작업 중단을 요구했다.

보니파스 대위는 이를 무시하고 작업을 속행할 것을 지시했고 11시 30분경 북한군 20여 명이 트럭을

타고 추가로 도착했다.

이때 박철 중위가 "그만두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라고 재차 위협을 가했으나 보니파스 대위는 무시했다.

박철 중위가 소매를 걷고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호주머니에 넣으며 신호를 보내자 북한군들은 일제히

소매를 걷었고, 박철 중위가 "죽여!"라고 소리를 지르자 북한군들은 트럭에 싣고 온 둔기와 한국인

노무자들이 사용하던 도끼를 이용해 기습적으로 집단 폭행을 가했다.

보니파스 대위가 북한군의 구타에 가장 먼저 쓰러졌고, 북한군 5명이 쓰러진 그에게 달려들어

도끼로 머리를 찍어서 살해했다.

마크 배럿 중위는 발견 당시에는 살아 있었지만 이송 중 사망하였다. 나머지 병사들도 유엔군

병사 1명을 제외한 전원이 부상을 당했다

판문점도끼만행사건사진

 

아서 조지 보니파스 소령(Arthur George Bonifas 1943년 4월 22일생, 추서 계급),

마크 톰 배럿 대위(Mark Thomas Barret 1951년 6월 9일생, 추서 계급) 보니파스 대위는 사건 당일

한국에서의 근무가 3일 남은 시점이었고, 후임 중대장 역시 JSA에 투입되어 인수인계 과정 중

이었기에 가지치기 작업 감독 지휘 정도는 충분히 후임 중대장에게 인계할 수 있는 업무였다.

배럿 중위는 JSA에 전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박병엽 전 조선노동당 고위 간부의 증언록에 의하면 이 사건은 당시 북한 주석인 김일성이 아닌

김정일의 지시였다고 한다.

당시 북한은 김정일이 후계 체제를 구축해 나가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김정일이 전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있었다.

김정일은 당시 UN군이 판문점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한다는 보고를 받고

"조선 사람의 본때를 보여주라. 단, 남조선 노무자들은 건드리거나 총을 쓰지 말고 미제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줘라."라고 지시했다.

북한이 혼자 사고 치고 난리를 치든 미국은 나무가 벌목되는 동안 북한이 총알 한 발이라도 도발을

가하면 대대적인 반격을 가할 생각이었기에 북한이 침묵하자 결국 미루나무를 자르는 선에서

작전을 종결짓고 사태는 마무리되었다.

판문점 경비초소에는 사건 이전과 같은 애매한 경계 대신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확실한 경계가

세워졌다. 경계 밖에 있던 양측 초소는 모두 철거되고 현재와 같은 상태가 되었다.

벌목된 미루나무의 일부는 JSA 안보견학관에 전시하여 방문객들에게 공개되고 있으며, 미루나무는

완전히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미루나무 둥치 둘레만큼의 둥근 시멘트 위에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비가 세워졌다.

판문점 관람 코스에 버스를 타고 추모비 앞을 지나는 것이 포함되어 있으며 버스 안에서

이 추모비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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