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만약 이라는 단어가 존재 할수는 없습니다
이미 지나버리 과거 이기 때문 입니다
하지만 많은사람들이 이 만약에.. 에 라는 가정을 아쉬워 하는것도 사실입니다
앞으로 저는 이 만약에 라는 단어를 역사속에 포함 시켜서 변할수 있었던 역사 를 가정해 볼까 합니다
1979년 제가 고등학교 2학년때 입니다
아침 뉴스에 박정희 대통령 의 서거 를 알리며 대변인이 눈물을 훔치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그뉴스 보고 가짜 뉴스 를 내보내는구나 생각 했지만 학교에 등교 한후에
선생님의 박정희 대통령이 오랜 독재를 하였지만 대한민국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분이라
말씀 하셨던것이 기억이나고 저역시도 아직도 재한민국 대통령중에서 박정희 대통령 같은 분 은
없는거 같고 제가 죽기전에 그분같은 대통령이 선출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역사속에서 만약에 를 적용시켜보겠습니다
중앙정보부장 김제규 의 선택이 남산 이였다면...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정권의 종말을 알리 는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서울 궁정동 안가에서 암살 하고 정승화 참모총장과 육군본부와 중앙정보부 어디로 가야할지를 결정해야할때
정승화 참모총장의 의견대로 육군본부 로 향하게 됩니다
만약 김재규가 남산 중앙정보부로 갔다면...
권력 장악의 시도 를 위해 남산으로 향한 김재규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 후 남산 중앙정보부로 향했다면,
그의 첫 번째 목표는 신속하게 국가의 통제권을 장악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남산의 중앙정보부는 당시 막강한 정보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대한민국 내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기관으로서 김재규에게 전략적 우위를 제공할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즉각적인 비상사태 선포
김재규는 남산에 도착하자마자 중앙정보부의 모든 자원을 동원해 비상사태를 선포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육군본부나 청와대에 비해 중앙정보부는 김재규의 영향력이 훨씬 강하게 작용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김재규는 통신망을 통제하고, 정보부의 네트워크를 이용해 군부의 움직임을 사전에 파악하려 했을 것입니다.
이는 군사적 충돌을 방지하고, 김재규가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군부의 지지 확보와 내부 분열 방지
중앙정보부에서 김재규는 군부 내 자신을 지지할 수 있는 장성들과의 연계를 시도했을 것입니다.
만약 그가 남산에서 빠르게 군부 내 인사들을 포섭하고, 자신이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면 일부 군 장성들이 그의 계획에 동조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군부 내에서 큰 갈등을 유발했을 수도 있습니다.
김재규의 남산 선택이 육군본부와의 대립을 심화시키고, 군부가 분열되는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정치적 혼란과 개혁 시도
남산에서 권력을 장악한 김재규는 박정희 정권의 유산을 청산하고
새로운 개혁의 방향을 제시하려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김재규가 비상사태를 이유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임시 정부를 구성했다면,
박정희 시절의 권위주의적 통치를 벗어나고자 하는 개혁적인 움직임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이는 군부와 정치권 내 개혁파, 그리고 당시 민주화 운동 세력들에게 일시적이나마 지지를 받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 시도가 군부 내 반발 세력과의 충돌을 유발해 또 다른 정치적 위기를 초래했을 수도 있습니다.
대안 역사적 변화와 그 영향
김재규가 남산 중앙정보부로 향한 선택은 단순히 한 사람의 도피나 보호를 위한 결정이 아니라,
당시 대한민국의 권력 구조에 중대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전략적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선택이 초래할 수 있는 대안 역사적 변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정치 체제의 급격한 전환
김재규가 남산에서 권력을 잡고 비상사태를 선언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붕괴와 함께
새로운 정치 질서가 등장할 가능성이 큽니다.
만약 김재규가 새로운 개혁 노선을 제시하고 이를 실천할 수 있었다면, 대한민국의 정치 체제는
박정희 시절의 권위주의적 통치에서 벗어나 보다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방향으로 나아갔을 것입니다.
군부 내 권력 재편과 내부 갈등
남산에서의 권력 장악 시도는 군부 내에서 분열을 촉발시켰을 가능성이 큽니다.
김재규를 지지하는 세력과 그를 반대하는 세력 간의 대립은 군사 쿠데타나 반란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었고,
이는 국가 전체의 안정을 위협할 수 있는 요인이었습니다.
군부가 분열되었다면, 대한민국은 단기간 내에 또 다른 군사적 충돌을 겪었을 수도 있습니다.
사회적 불안과 국민의 갈등
김재규의 권력 장악이 국민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가에 따라 사회적 불안정이 가중될 수 있습니다.
박정희의 지지층과 반대층 간의 갈등이 심화되거나, 새로운 정치적 대립 구도가 형성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김재규의 개혁 시도는 일부 국민들 사이에서 환영받았을 수도 있지만, 동시에 박정희 정권의 지지자들에게는
배신으로 받아들여져 대규모 시위나 저항이 발생할 수도 있었습니다.
외교와 경제 정책의 변화
김재규가 박정희와 차지철을 제거한 후 남산에서 권력을 잡으면서,
박정희 시절의 경제 정책과 외교 노선이 변화할 가능성이 큽니다.
김재규가 더 개방적이고 개혁적인 정책을 추진한다면, 한국의 경제 구조와 국제적 위치에도
큰 변화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특히 미국과의 관계에서 더 독립적인 노선을 추구하거나, 당시의 냉전 구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외교적 지평을 열 수도 있었습니다.
역사의 만약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다
10.26 사태는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거대한 전환점이 된 사건입니다.
김재규의 선택이 육본이 아닌 남산이었다면, 그 선택은 단순한 권력 장악을 넘어
대한민국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중대한 분기점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안 역사는 어디까지나 가상의 시나리오일 뿐, 실제 상황은 그와 다른 결과를 낳았습니다.
역사의 "만약"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지만, 그 가능성들이 실제로 현실화되었을 때
어떤 결과를 낳았을지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러한 상상을 통해 우리는 당시의 선택과 그에 따른 영향을 더 깊이 이해하고,
오늘날의 교훈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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