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디오 아침방송 홈런 출발 김동엽
1988년 초여름으로 기억나는데 제가 87년 어머니와 종로에 있는 마로니에 음악다방을 하다가
88년 4월경 문을닫고 다방 한다고 대학교 1년 휴학을 하여 복학하기까지 시간이 남아서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게 영업인데 아침에 회사에 출발할 때 신촌역을 지나 이대 쪽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안녕하세요 홈런출발 김동엽입니다" 하는 활기찬 목소리로 라디오 아침방송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김동엽 감독님은 김성근 감독님과 같은 스타일로 매우 엄하고 힘든 훈련을 시키기로 유명한
호랑이 감독님 이였던걸로 기억합니다
제 기억으로는 프로야구 감독하시기 전에 한양대학교 감독을 하시면서 트레이드 마크인
빨간장갑을 끼시고 선수들을 엄하게 훈련시켜 우승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고향이 이북인 황해도 분이신대 선수들이 황해도 사투리 를 어떻게 알아듣고 훈련을 받았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저에 아버님도 고향이 이북이신 평안남도 분이신데 이북오도 체육대회에 나가보면 이북오도 중
황해도 인구가 가장 많습니다 아무래도 남한과 가깝다 보니 다른 지방보다 많이 월남 하신 거 같고
이북사람들 대부분 그렇지만 황해도 분들 정말 성질머리 지랄 맞습니다
다시 김동엽 감독님으로 김동엽 감독님은 KBO 리그의 야구감독 및 야구 해설가. 1971년
건국대 감독으로 데뷔한 것을 시작으로 1987년 MBC 청룡 감독에서 물러날 때까지 무려 13번의
모가지를 당한 파란만장한 감독 생활로도 유명했습니다.
다음은 인터넷 자료에 의한 김동엽 감독님 내용 입니다
♥ 현역시절
6.25 전쟁이 터지자 김동엽은 할아버지와 헤어져 부모님을 따라 월남했고, 피난지인 부산의
토성초등학교에서 야구를 시작하여 경복고 와 성균관대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시절 어깨 부상으로 인해 잠시 야구를 그만두고 폭력 조직의 말단 대원으로 뛴
경력이 있는데, 이 당시 싸움판에서 턱과 치아를 크게 다치는 바람에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치아가
좋지 않아 고생했다고 한다.고등학교 당시 일화 이후 마음을 고쳐먹고 성균관대학교 영문학과에
시험을 쳐서 들어갔다가 같은 학교를 다니던 야구 선배의 권유를 받고 다시 야구를 시작하여
2루수로 제법 활약을 보였다.
대학 졸업 후 한국전력에서 선수로 뛰었으나 폭행사건에 연루되는 바람에 1963년에 퇴단당했는데,
그 이유는 휴가를 받아 저녁에 동료와 외출을 나갔다가 폭력배들과 시비가 붙었고 완력하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김동엽이 완승을 거두었으나 상대방 중 한명이 쇄골이 골절되는 중상을 입는
바람에 쇠고랑을 찰 위기에 놓였기 때문이다.
결국 어찌어찌 회사에서 무마를 시켰지만 그 대가로 유니폼을 벗어야 했다.
한편으로 폭행사건으로 곤혹을 겪던 김동엽이 경찰에서 풀려난 데에는 한전 코치 어우홍의 형이자
당시 경향신문 사회부 기자였던 어인영 이 뒤에서 손을 써준 덕도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어우홍은 김동엽과 팀내 사제지간이었지만 서로 사이가 상당히 좋지 않았고,
김동엽을 한전에서 쫓아내는 데 앞장선 이가 바로 어우홍이었다.
한전에서 잘린 후, 당시 한전 감독이던 김계현의 주선으로 조흥은행에 이적했지만 입단 직전에
조흥은행 광교 본사가 대형 화재로 잿더미가 되는 바람에 회사 분위기가 엉망이 되었고,
이 와중에 운동부를 운영할 여력이 없다며 야구부와 여자 농구부를 해체시켜 버리는 바람에어쩔 수
없이 바로 은퇴하고 말았다.
♥ 심판 시절
선수 생활을 마친 후 지도자로 바로 가지 못하고, 대한야구협회 심판으로 활동했다.
이 당시 특기할 만한 일은 1963년[13] 제5회 아시아야구 선수권대회에 심판으로 출장,
일본팀에 대한 극심한 편파 판정을 하여 한국팀의 우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 대회는 한국·일본·필리핀·대만 4개국이 참가했는데, 당시 한국 야구협회는 홈에서 열린
이 대회에서 꼭 우승을 차지하기 위해 심판들에게 일본팀을 집중적으로 견제하라고 지시했고,
일본전 주심을 맡은 김동엽은 스트라이크/볼을 엉터리로 판정한 끝에 일본팀의 멘탈을 나가게
하여 한국이 우승할 수 있도록 공을 세웠다 카더라.
여기서 또 다른 에피소드로, 당시 한국일보 체육부 기자이던 오도광 씨가 김동엽의 편파 판정에
대해 "치졸한 애국심"이라는 타이틀로 그를 호되게 비판하는 기사를 올린 적이 있었다.
당시 오 기자는 김동엽과 친한 것도, 그렇다고 서로 으르렁대던 것도 아닌 그냥 살짝 면식만 있던
정도였고 김동엽에 대한 기사를 올린 사실조차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수십년이 지난 후
오 기자의 사위가 "김동엽이란 양반이 쓴 회고록(후술할 그래 짤라라 짤라)에 장인어른 얘기가
있더라"고 전하여 그 책을 읽어 보니 "그래도 오도광 기자는 냉정함을 잃지 않고 중립적인 시각으로
비판할 줄 아는 기자 정신의 소유자였다"라며 오 기자를 칭찬하는 내용이었다.
아무튼 오 기자는 전혀 생각지도 않은 사람에게 호의적인 평을 들어서 기분은 흡족했다고 한다.
♥지도자 시절(아마추어)
이후 대한체육회에서 개설한 코치 아카데미를 수료한 후 1971년 창단한 건국대학교 야구부
초대 감독에 취임하면서 본격적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건대 감독이 된 그해 겨울 학교 운동장에 비닐하우스 훈련장을 만들어서 선수들에게 엄청난
스파르타 훈련을 시키며 창단 1년만에 학교를 전국대회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 당시 에피소드로 김동엽이 학교에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달라고 하자 관계자가 "
이 겨울에 채소라도 키우려고 그러느냐"고 물었고, 김동엽은 "그렇다.
건대를 건강하게 키울 야구 채소다"캬라고 답했다는 얘기도 있다.
덕분에 그 해 건국대는 전 해에 비해 입시원서가 3배 넘게 팔리며 학교의 인기가 상한가를
쳤다고 한다. 이후로 성무, 실업 롯데, 성균관대, 한양대 등의 감독을 역임하며 특유의 카리스마 넘치는
스파르타 식 훈련으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러나 고집불통에 직설적이고 불같은 다혈질의 성격이었던 탓에 구단 고위층과의 충돌이 잦았고
선수들과의 마찰도 적지 않아 한 팀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고 서두에서와 같이 13번의 해임이란
흑역사를 남기기도 했다.
평소 김동엽은 자신의 의견과 부딪히거나 옳지 않다고 생각되면, 선후배는 물론 지위고하도 안가리고
걸쭉한 황해도 사투리가 섞인 "제-에-미~"로 시작하는 투박하고 직선적인 말투로 마구 따지고
대들었다고 한다.
실업야구 롯데 자이언트의 창단감독으로 취임한 1975년 12월, 부산 전지훈련에서 연세대학교
야구부와의 연습경기때 선수들이 무기력한 플레이를 보이자, 이에 격분한 김동엽 감독이 서울까지
전 선수단을 13일간 하루 50km 구보로 복귀시킨 사건은 유명한 일화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신생팀의 홍보 효과를 노리고 사전에 김동엽이 혼자서 구상한 이벤트였다고 한다.
때마침 선수들이 연습경기에서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자 김동엽이 기다렸다는 듯 즉흥적인 결정인양
자연스레 준비해 둔 카드를 꺼내든 것.
이때부터 보름간 롯데 선수들은 구간 마라톤 형식으로 서울까지 뛰어야 했다.
그리고 이것이 이현세 작 '공포의 외인구단'의 지옥훈련의 모티브가 되었다.
당시 롯데 관계자가 펄쩍 뛰면서 한 겨울에 선수들이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냐고 반대하자,
이미 전문의의 협조 하에 안전하게 뛰게할 조언까지 받았다면서 오히려 엄청난 홍보효과가 계획대로
나타날 거라 장담했다.
실제로 롯데 야구단의 구보 복귀 이벤트는 언론의 관심을 끌면서 당시 신생팀이던 롯데 자이언트의
인지도는 확 치솟았다.
당시 실업 롯데 소속으로 구보에 참여했던 천보성(삼성), 정현발(삼성), 차영화(해태), 김용희(롯데) 등의
선수들은 대부분 한국프로야구의 원년 창립멤버로 활약했다.
본인은 행군하는 선수들에게 솔선수범을 보인 것이 아니라 옆에서 자전거를 타고 선수들을
독려했다고 한다.
이 때 생긴 에피소드로, 부산~서울간 구보 종료 당일 구단에서 선수들을 위해 불고기 회식을 마련
했는데 투수 양한철이 맥주를 원샷했다가 그 자리에서 졸도하여 병원에 실려간 일이 있었다.
장거리 구보로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에서 알콜이 들어오는 바람에 탈이 난 것인데, 그 일로
양한철은 한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그리고 김동엽은 1977년 1월 18일 부터 1월 31일 까지 13일 동안 이른바 통일염원의 대행군이라는 명
목으로 또다시 롯데 선수단을 전남도청에서 임진강 자유의 다리까지 총 480km를 행군시키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지도자 생활 외에도 특유의 입심을 앞세워 프로야구 출범 이전 TBC, KBS 등에서 야구 해설위원으로도
맹활약 했다.
♥ MBC 청룡 감독 1기
이후 약 1년 간 MBC의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이듬해 백인천이 시즌 초반 감독직에서
이탈한MBC 청룡의 콜업을 받고 후기리그 부터 감독으로 취임하여 특유의 선수 장악력으로
어수선한 분위기를 수습하고 MBC를 후기리그 우승으로 이끌며 1983년 한국시리즈 진출 티켓을
거머쥐었다.
때마침 시리즈 상대는 전해 자신을 자른 해태 타이거즈였고 김동엽 감독은 누구보다도 전의를
불태우며 복수의 칼을 갈았다.
그러나 하필 한국시리즈 개막을 며칠 앞둔 10월 9일 아웅산 사태가 터지며 개막이 일주일 정도
연기되었고 그 사이에 보너스 지급 문제가 불거지며 선수단 분위기가 와해되는 바람에 해태에
1무 4패로 속절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그 해 후기리그 막판, 김동엽 감독은 선수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후기 우승시 선수들에게
1인당 5백만원 씩 보너스를 주겠다"라고 발언했고 이에 고무된 선수들이 결국 우승을 실현시켰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후기리그 우승 축하연에서 모 고참급 선수가 구단 관계자에게 보너스 지급
여부를 물었다가 무슨 소리냐며 면박만 당했고, 이에 선수들의 사기는 급전직하 하고 말았다.
당황한 김동엽은 "내가 집을 팔아서라도 주겠다"라고 선수들을 달랬지만, 당시 해태는 우승 시
보너스로 1억원을 푼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고,기가 죽을대로 죽은 선수들에겐 무소용이었다.
당시 구단주이던 이웅희 MBC 사장이 벼랑 끝에 몰린 5차전 전날 밤 김동엽 감독을 찾아가
"우린 2억원을 풀겠다"고 전하라 했지만, 이미 해태에 1무 3패로 밀리고 있던 상황인지라 버스
떠난 뒤 손 흔들기 였다.
결국 한국시리즈 제패에 실패한 김동엽은 준우승 감독임에도 불구하고 또 잘렸다.
시리즈 당시 MBC 선수들의 무기력한 플레이에 김동엽의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작전이나 선수
기용으로 인하여, 항간에서는 "5.18 민주화운동으로 현 정부에 대한 반감이 큰 광주의 민심을
달래기 위하여 5공 정권에서 MBC가 해태에게 우승을 양보하도록 압력을 넣은게 아니냐"는
루머까지 돌 정도였다.
후일 김동엽은 "결전을 앞두고 선수들과 돈 때문에 승강이를 벌여야 하는 것에 환멸을 느껴서 승리에
대해 전혀 의욕이 나지 않았다"고 해명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런 식의 경기 운영은
감독으로서 태업이자 직무유기임에 틀림없다...
이후 약 2년 정도 야인 시절을 보내던 중, 육영재단 산하 어린이회관 의 어린이 야구교실 감독으로
활동한 적이 있다. 그 당시 국민학교(현재는 초등학교) 아이들을 상대로도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악명을 떨쳤고, 그 넓은 어린이회관을 몇 바퀴 돌리는 식의 체력훈련을 시켰다고 한다.
♥ MBC 청룡 감독 2기
1985년 시즌 어우홍이 이끌던 MBC가 전기리그 5위(당시는 6개 구단 체제)로 추락하자,
MBC는 어우홍을 감독직에서 중도해임 시키고 후임 감독으로 김동엽을 재영입했다.
이당시 계약 연봉이 3천만원으로, 7개구단 중에서 최고였다는 점에서, 그가 두번의 실패를
겪었지만, 그 시점에서는 그래도 한국 최고의 명감독으로 추앙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해 후기리그 부터 사령탑에 오른 김동엽은 흐트러진 팀 분위기를 다잡으려 했지만 MBC는
후기리그 6위로 떨어지며 종합 5위로 당시 기준으로는 창단 이래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하지만 오프 시즌에서 절치부심한 김동엽은 1986년 시즌 혜성같이 떠오른 슈퍼 루키 김건우를
앞세워 전기리그는 4위에 그쳤지만 후기리그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OB 베어스와 정규시즌 막판까지
치열한 플레이오프 진출 경쟁을 벌였다.
시즌 최종전인 9월 17일 해태 타이거즈와의 전주 경기를 9대 4 승리로 이끌고 1983년 한국시리즈
이후 3년 만의 가을야구를 확정짓나 싶었지만, 같은 날 잠실에서 OB 베어스가 롯데 자이언츠에게
9회초까지 1대 3으로 뒤지다가 9회말 최동원을 상대로 동점 투런홈런을 뽑아낸 김형석과,
3루타를 치고 중견수 홍문종의 송구 실책으로 끝내기 득점까지 올린 신경식의 활약으로 극적인 4대 3
역전승을 거두며 후기리그 2위로 플레이오프행 티켓을 낚아챘고,
MBC는 3위로 미끄러지며 전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덧붙이자면 이 시즌에 KBO가 부정위 타자 문제로 시비를 걸자 제대로 엿먹인 사건도 있었다.
그리고 이 해 MBC는 자매 구단인 주니치 드래곤즈에 요청하여 일본인 코치 미즈타니 히사노부를
영입했는데, 김동엽과는 야구관이 극단적으로 달랐던 탓에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그러나 MBC 구단 측에서는 김동엽보다 미즈타니를 더 신임했고, 1987년 시즌부터는 김동엽의 투수
기용을 포함한 대부분의 선수단 운영 권한을 미즈타니에게 부여하였다.
여기에 선수들의 감독 불신임 여론까지 겹치면서 결국 김동엽은 그 해 후기리그 개막 직전 유니폼을
벗고 말았다.
감독 불신임을 놓고 공식적으로 투표를 한 건 아니었고, 구단 고위층에서 몇몇 고참급 선수들을
비밀리에 불러 김동엽의 재신임에 대한 의견을 물었는데, 전부 부정적인 입장을 내세웠다.
이런 고약한 전통은 1989년 시즌 감독이던 배성서의 퇴진시에도 재연된 바 있다.
그것으로 김동엽의 감독 인생은 끝이었다.이런비상식적인 갑질을 LG트윈스가 배운거 아닌가요?
♥ 야구계를 떠난 이후
MBC 감독을 끝으로 현장을 떠난 이후 1992년부터 SBS에서 야구 해설가로도 활동하다가,
1994년 시즌 도중 야구 선수들의 병역 문제를 건드리는 설화를 일으켜 중도 하차하였다.
정확히는 프로야구 선수들이 군대에 가면 실력이 퇴화하니 군대에 안 가면 좋겠다고 말했는데,
이건 현재도 그렇지만 당시로 봐도 큰 오버였다.
호불호가 확실하긴 했지만 해설가로서의 평가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원래부터 TV나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를 맡을 정도로 입담이 출중하기도 했고, 당시에는 감독 출신
해설가가 드물었기 때문에, 현장에서 선수들을 지휘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여러가지 상황 설명
또는 예측이나 데이터 분석, 그리고 야구 전문가만의 지식을 일반 야구팬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주는 능력이 뛰어났다.
프로 감독으로서의 성과가 그다지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김동엽은 빠따로 상징되는
특유의 강압적인 지도 방식만 있는게 아니라, 나름대로 스포츠 과학이나 야구 이론에 대해 상당
수준의 지식을 보유했다는 것을 그의 해설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사실 상술된 구보 일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세간의 인식처럼 무식한 야구인은 아니었던 셈.
하일성은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예측하는 자신의 해설 스타일을 수립하는데 큰 영향을 준 인물로
김동엽을 꼽기도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빨간장갑 야구단이라는 독립 야구단을 만들어 최근의 고양 원더스처럼 프로야구
에서 퇴출된 선수들을 모아 지옥훈련을 통해 다시 재활시킨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재정 문제 등으로 흐지부지 되어버린 일도 있다.
이후 예능 프로의 패널로 나오거나 1995년 3월 13일 SBS 주간시트콤 <두 형사> '빨간장갑의 비애'
편에 출연하면서 탤런트로 전업하여 후속작인 <형사5>에 형사반장 김자풍 역으로 고정출연하는 등,
인생 말년에 상당한 굴곡을 일으키기도 했으며, 그 외에 기업체 강사, 방송계에서 리포터 등으로
활동하였다.
1995년 10월 15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OB 베어스 vs 롯데 자이언츠와의 한국시리즈 2차전 때
직관을 온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총재 김대중, 이희호 부부와 함께. 경기종료까지 줄곧 옆에서 경기
상황을 해설해 줬다고 한다.
학연이나 지연으로는 전혀 접점이 없을 것 같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과 상당한 친분관계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1992년 대선 당시 김대중 후보 지지를 선언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 정계입문 이야기도 나왔으나 결국은... 1995년 말 현대 유니콘스의 창단 감독으로 하마평에
오르기도 했지만, 그 이전부터 적립해온 지도자로서의 부정적인 평가 때문에 무산되었다
당시 김동엽은 MBC 토크쇼 <김한길과 사람들>에 출연하여 "8년 동안 절치부심 하면서 기다렸다.
(그라운드로)꼭 돌아갈 것"이라고 다짐을 남기기도 했다.
1997년 3월 해태 타이거즈의 고문으로 다시 야구계에 복귀하였고 한편으로 프로야구
정보관련 유료전화 사업을 준비하던 중, 시즌 개막을 불과 며칠 앞둔 그해 4월 10일 혼자 기거하던
용산구 한남동의 독신자 아파트에서 변사체로 발견되면서 마지막까지 세간에 큰 충격을 남기고
향년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등졌다.
김동엽은 죽기 몇 해 전부터 가족들에게 버림받은 이후 경제적으로도 궁핍한 지경에 처하는 등
상당히 어려운 말년을 지냈고 후배들에게도 종종 손을 벌리는 등 초라한 몰골을 비추기도 했지만,
그래도 항상 호탕한 웃음을 잃지 않는 당당한 모습을 보이려고 애썼다고 한다.
가끔 호텔 등지에 출입해 오랜 시간을 머무르며 손님들에게 입담 퍼레이드를 펼치는데, 얘기가 워낙
재미있어 시간 가는 줄 몰랐다는 일화도 있다.
운동 마치고 나가려는 데 웬 덩치좋은 양반이 카운터에 서 계시면 틀림없이 고인이었다고.
♥ 불꽃같은 쇼맨십
생전의 김동엽은 누구보다도 쇼맨십을 즐기던 야구인이었다.
심판 시절 누구보다도 크고 요란한 판정 동작과 아웃당한 주자를 손가락으로 집어내는 듯한 제스쳐로
관중들을 포복절도 시키기도 했고, 감독이 되어서도 경기 때 직접 3루 주루코치로 나가 작전을
구사하거나, 무용을 하는 듯한 현란한 작전지시, 여성관중을 위한 팬서비스로 엉덩이에 타월을 집어
넣고 일부러 두툼하게 만들어 실룩실룩 흔드는 등의 기행을 보였으며, 타자들이 끼는 빨간 배팅용 장갑을
끼고심판을 향해 일부러 크게 삿대질을 하되 실제 대화는 소위 '노가리'를 까는 등의 행동을 했다.
관중들의 즐거움을 위해 김동엽 본인 스스로 망가진 셈이나 다름 없었다.
한번은 경기 중에 별것 아닌 판정이었는데, 김동엽 감독님이 더그아웃에서부터 2루심이 있는 곳까지
부리나케 달려 나오시더라고요. 그때 2루심이 김옥경 심판이셨는데, 두 분이 친하거든.
그런데 김 감독님이 달려나와서 뒷짐을 지고 배를 막 들이대는데, 김옥경 심판이 짜증스럽다는 표정으로
"아, 왜 나왔어?" 하니까, 김동엽 감독님이 "오늘 중계 있잖아?"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날 중계가 없는 날이었거든. 그래서 김옥경 심판이 "오늘 중계 없어." 하니까 "아, 그래?"
하시더니 그냥 얌전히 들어가시더라고요.
그분은 심판에게 항의하는 것도 하나의 쇼였어요. 심지어 경기 전 심판을 만나
"야! 오늘은 한 10분 정도 나와 있을테니 준비하고 있으라우!!"라고 미리 통지하는 경우도 수두룩 했다.
그러고는 경기 중 그라운드로 튀어나와 특유의 빨간 장갑을 낀 현란한 손짓으로 심판에게 다가가
눈을 부릅뜨고 삿대질을 해대며 "날씨가 왜 이리 좋아? 안 더워? 오늘 끝나고 뭐해? 한잔 할까?"
이렇게 10분씩 떠들고 내려가곤 했다고...가끔 TV 중계가 있는 날이면 사전 통지 없이
"나랑 5분만 얘기 좀 하자"면서 뜬금없이 그라운드로 나오는 일도 있었고, 그러면 상대 심판은
"형님, 이 선 넘어오지 말고 5분만 떠들다 가쇼. 5분 넘기면 퇴장이유!"라고 경고(?)하면서
홈 플레이트에 발로 금을 그어놓고 김동엽의 대거리를 받아주었다.
지금 같으면 경기지연 행위로 경고를 먹을 만하겠지만 이것도 어찌보면 당시 야구판의
낭만이었는듯 하다이렇듯 항의라고 한 것 대부분이 심판과의 노가리였고 정해놓은 항의 시간은
칼 같이 지켰던데다 본인도 심판 출신이라 어떤 선을 넘으면 퇴장을 당한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는지라, 프로 감독으로 활동하는 동안 그 격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퇴장은 단 한 번도
당하지 않았다.이와 같이 많은 팬들을 김동엽 특유의 쇼맨십으로 즐겁게 해주곤 했다.
한마디로 스스로 망가지며 권위를 무너뜨린 것인데, 권위주의가 많이 탈피된 현대 시대에는 매우
진보적인 모습으로 보여지지만, 지금과는 달리 권위주의가 팽배했던 시절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김동엽은 이와 같은 스스로를 낮춰가며 권위를 무너뜨린 모습 때문에 팬들과 선수단 모두에게 외면당했다.
MBC 감독 말엽에는 아예 프런트가 미즈타니를 노골적으로 지지하고 선수단은 김동엽을 투명인간
취급했다는, 요즘 말로 치자면 김동엽을 기수열외 시켰다는 설도 파다했다.
이 점은 아래 비교 대상이 된 김성근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면인데, 김성근은
(선수와 스스럼없이 어울리던 이만수를 겨냥하여) "선수와 감독이 농담을 하는 것이 훈훈하게
보일지 몰라도 (그정도로 권위가 없어지면) 그 팀은 망한다"고 주장한 바 있을 정도로, 감독의 권위를
중시했고 선수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한창 승승장구하던 SK 시절조차 이겨도 거의 기쁜 모습을 안보였을 정도다.
그렇게 야금 야금 투수 생명을 갉아먹었다 또한 방송계에서도 특유의 입담을 과시하며 야구 해설은
물론《홈런출발》, 《김동엽과 함께》 등의 라디오, TV프로 진행자를 맡기도 했고, 각종 연예프로나
드라마 출연에 당시 프로야구 감독으로는 드물게 CF를 여러 편 찍을 정도로 상당한
국민적 인지도를 자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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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ostheri.tistory.com/251
https://mostheri.tistory.com/253
https://mostheri.tistory.com/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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