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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나에 지나간시절

LG트윈스 의 전신 1985년 프로야구 MBC청룡 이야기

by mostheri 2022.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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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락하는 MBC 청룡

1985년 은 제가 군 복무를 하고 있을 때라 내무반에서 프로야구를 보기 가 매우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제가 군대 운이 좋아서  제대 1년을 남기고 내부반 최고참이 되어서

10월에 열리는 코리안시리즈를 편안하게 볼 수는 있었지만 1985년 MBC 청룡은 비가 오지

않아서 인지 추락에 추락을 하다가 후기리그에는 결국 6개 팀 중에서 꼴찌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 당시 코리안 시리즈는 저에게 별 의미가 없는 그런 한해 이었던 것 같습니다 

1985프로야구 전기리그
1985프로야구 후기리그

프로야구가 출범한지도 3년째 국가대표급 화려한 선수층으로 매년 우승후보로 손 꼽히던

청룡이었지만 언제나 뒷심이 부족하여 무너지는 것을 반복했다.

뒷심부족 프런트문제 이게 청룡때 부터 시작하여 지금의LG트윈스까지 이여지는 아주

고약한 내력인것 같습니다 

매년 우승권으로 평가받음에도, 그 기대에 번번이 부응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있었고 자연스레

직접적인 전력 보강보다도, 우선적으로 팀의 분위기 쇄신이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이 강해졌고,

이에 따라 또 다시 숙청의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전년도의 희생양이 김동엽 감독이었다면, 이번엔 팀 내 주장인 이해창과 최고참 이종도가

숙청 대상이 되었다. 주장 이해창은 성적은 나쁘지 않았지만(.273 6홈런 36도루 WAR 3.71),

선수협 주동문제와 연봉문제와 관련해 구단측과 사이가 꽤 깊이 벌어져 있었고 이종도는

첫 2년간은 부동의 중심타자로서 그 몫을 다했으나(82~83 평균 .308 9홈런 55타점 18도루),

서른 중반에 가까워진 나이와 전년도에 1할대에 머무는 극심한 부진으로 하락세만 남았다는

판단 하에 전력 외로 분류되었다.

결국 이해창은 비슷한 처지에 있던 삼성의 비운의 투수 이선희와 트레이드 되었고. 이종도는

이 해부터 같은 서울연고(청룡은 잠실-OB는 동대문)를 쓰게된 OB로 1800만원에 현금 트레이드를

통해 이적하게 된다. 이해창을 이선희로 바꾸며 탄탄한 마운드(84년 팀 방어율 1위)를 더 두텁게

만드는데 성공한 청룡의 다음 타겟은 그 두터워진 마운드를 이끌어야할 안방마님, 포수였다.

차동열과 박철영이라는 기대주들의 성장이 더디고 원년 골든글러브 포수 김용운과의 재계약이

연봉문제로 지지부진한 탓에 내야수 신언호를 포수로 다시 전환시키는 것까지 고려했는데 역시나

연봉문제로 롯데와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던 당대 최고의 수비형 포수이자 국가대표 출신의 

심재원을 3월 김용운+현금 300만원으로 영입하는데 성공하며 그 고민을 해결했다.

미계약상태였던 조호, 박석채, 이성수, 최정우, 편기철, 신계석 등 6명을 자유계약선수로 공시 신청했다.

지난 3년과 달리 OB가 1985년부터 서울로 연고지를 이전함으로써 기존의 2-1 지명 방식에서 1-1 지명

방식으로 변하게 되었다.

동전던지기 추첨으로 우선권을 정해 지명했다.

서울팜을 기반으로 한 유망한 신인들의 수급 또한 나쁘지 않았다.

OB와의 주사위 싸움을 연전연승하며(4연승) 중앙고 시절 광주일고 선동열을 완봉승으로 셧아웃시킨 

고려대의 안언학과 고려대의 탄탄한 투수진에 막혀 빛을 못 보다 휴학 후 실업무대에 뛰어들어 리그를

평정하다시피한 아마추어 거물, 정삼흠[5]을 지명했다. 이 밖에도 국가대표 출신의 한일은행의 김용수,

한양대의 박흥식, 상업은행의 윤덕규 등을 지명하며 이종도와 이해창이 빠져나간 곳을 채울

신예들을 보강한다.

 

★ 신인선수

안언학(중앙고-고려대, 내야수)

박흥식(신일고-한양대, 외야수)

정삼흠(명지고-고려대(중퇴)-포철, 투수)

예병준(동대문상고-농협-상무, 투수)

윤덕규(대광고-상업은행, 외야수)

유지홍(선린상고-고려대, 내야수)

 김용수(동대문상고-중앙대-한일은행, 투수)

 

언론으로부터 해태나 삼미보다도 낮은 순위를 거둘것으로 예측되었던 청룡은 초반 김인식과

이광은이 4할이 넘는 타율, 김상훈은 3할 중반대로 맹타를 휘둘렀고, 김용달이 초반 3홈런으로

홈런 선두에 나서며 순위도 OB에 이어 2위로 구호대로 화끈한 야구를 펼치고 있었다.

우승후보 OB에 1승2패를 거둔 뒤, 또다른 우승후보 삼성 원정에서 위닝시리즈, 연패 중인 최약체

삼미와의 2연전에서 재일교포 유고웅의 만루홈런으로 같은 재일교포 장명부를 무너뜨리는 등

2연승을 거두며 5승3패로 순항했다.

그러나 곧바로 디펜딩챔피언 롯데와의 홈경기 3연전에서 스윕패를 당하며 OB와의 홈경기에 이어

홈에서 4전 전패를 당했고 삼미의 기록적인 연패로 승률 인플레이션 현상이 일어난 가운데 2위에서

5위로 곤두박질쳤다.

홈에서의 첫 승은 5번째 홈경기인 4월 19일 해태와의 경기에서 이루어졌다.

4월 중순까지 5할에서 불안한 외줄타기를 하고 있었으나 4월 23일과 24일 8연승을 기록하고 있던

삼성과의 홈 2연전에서 9:3, 2:0으로 패배하며 삼성의 10연승 최다연승 신기록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신인 정삼흠은 방어율이 3.00이었음에도 4패에 그치며 극심한 불운에 시달리기도 했다.

4월 30일 18연패의 삼미 원정에선 최계훈에게 완봉승을 헌납하며 0-3으로 패배, 삼미의 18연패

탈출의 제물이 되는 치욕을 당했다.

청룡이 급격하게 성적이 추락한 이유는 투타의 불균형과 베테랑들의 부재를 들 수 있었다.

시즌 초반 3개의 홈런으로 홈런레이스 선두에 있었던 김용달은 그 3개의 홈런 이후 단 1개의 홈런도

치지 못하며 아름다운 1주일이 되어버렸고 시즌 초 장명부에게 만루홈런을 쳤던 재일동포 유고웅은

슬럼프에 빠졌다.

김재박과 이광은, 김인식과 같은 중고참들이 고군분투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물방망이 타선이 되자 투수진은 잘 던져도 패전투수가 되는 경우가 많았고 나중에는 타선과 함께

나락으로 빠지며 연패의 늪에 내몰렸다.

삼미전 9승2패를 기록한 걸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구단에게도 상대전적에서 우세를 가져가지

못했다.

서울 라이벌 OB전은 잠실에서 6전 전패를 포함해 8연패를 당하는 굴욕을 당했고 전기리그 우승팀

삼성에게도 잠실에서 5전 전패를 당했다.

어웨이 경기에서 5할을 넘겼지만 오히려 홈에서 약했다.

전기리그 홈경기에서 8승19패로 .296 승률로 3할이 안됐다.

게다가 삼미전을 제외하면 승률이 .326으로 처참했다.

이종도와 이해창을 보내버린 결과 분위기가 좋을때 들뜨지 않게 자제시켜줄 인물과 연패로

침체되어있을때 솔선수범 나서 투지를 불러일으킬 리더가 사라졌다.

결국 추락에 추락을 거듭하자 MBC는 자존심을 버리고 이미 자신들이 83시즌이 끝나고 내친 바

있는 김동엽 전 감독을 복귀시켜 후기리그부터 이끌고 어우홍을 총감독으로 선임하며 사실상

경질시켰다.

어우홍 감독과 계약시 내걸었던 재임 3년의 기간동안 어떤 터치도 하지 않겠다는 조약을 어기고

어 감독을 총감독으로 올리고 현장감독으로 김동엽 감독을 선임한다는 말같지도 않은 비열한

꼼수로 구단 이미지를 심각하게 손상시키며 빈축을 샀다.

이 과정에서 언론에 집중포화를 당하며 구단 매각에 대한 쓴소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이를

의식하며 MBC 청룡은 기존 문화방송국 산하의 집단에서 독립법인 (주)MBC 청룡으로

단일개체화되어 분리운영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해설위원이었던 박용진을 코치로 불러들였고 베테랑 외야수인 김인식이 플레잉코치가

되며 선수와 코치를 겸하게 되었다.

김동엽 감독의 빨간장갑 마법은 두 번 재현되지 않았다.
 
어우홍 체제의 코칭스태프를 물갈이하며 새로운 시작을 천명했고 후기리그 개막하기 전
 
합숙훈련도 가져봤지만 전반기에 보여줬던 무기력한 모습이 더 심해지며 성적은 오히려
 
그것보다도 더 떨어졌다.
 
하기룡-이길환-김봉근 등의 주축 투수진들의 릴레이 부상과 동시에 유종겸-정삼흠-이선희가
 
근근히 버텨주던 마운드가 후반기 들어 완전히 붕괴해버린 탓에 천하의 김동엽 감독조차 어떻게
 
손을 써 볼 방도가 없었다.
 
전반기 바닥을 기던 청룡보다 아래에 위치해 "바닥에는 더 바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삼미에서
 
이름만 바뀐 청보 핀토스의 진격과 맞물려 최후의 보루인 5위자리까지 함락되는 초유의
 
사태로 이어졌다.
 
결국 창단 이래 최악의 성적인 승률 .370에 6개 구단 중 최하위로 후기리그를 마감했다.
 
시즌 전 언론의 최약체 진단이 정말로 현실이 되었다.
 
한 수 아래로 여겼던 해태에 맞대결 10연패에 7월 5일에서 7일까지는 3연전 0득점이라는
 
굴욕적인 기록도 쓰고 말았다.
 
그나마 청룡의 체면을 세운건 당시 신기록이었던 이광은의 19경기 연속 안타 와 김재박이 50개의
 
도루로 도루왕을 차지하며 김일권의 독주를 저지한 것 정도였다.
 
서울의 유일한 야구팀이었던 타이틀이 사라진 첫 해 어느새 청룡은 팬들에게 낯을 들기 부끄러운
 
야구팀으로 추락해버렸다.
 
하지만 바닥을 기는 팀성적 덕분에 신인들인 정삼흠, 김용수, 박흥식, 윤덕규가 경험치를 많이
 
얻어가며 후에 팀을 이끄는 주축 선수들로 성장할 수 있었다.

★ 리그 뒷담화 와 수상기록 

경향신문에서 예상한 순위로는 전체 구단 중 꼴찌였다.
 
이해창과 이종도를 트레이드해서 부메랑을 맞을 것이라는 예측이다.
 
지난 해까지 단독 서울 연고 야구팀이었으나 1984년을 끝으로 OB 베어스가 연고지를 대전에서
 
서울 동대문 야구장으로 옮기며 청룡은 단독 서울 연고팀이 아니게 되었다.
 
청룡은 화끈한 야구 승천하는 MBC라는 구호를 내걸었고 OB는 서울 입성과 함께 우리 모두
 
서울 OB 베어스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OB의 서울 입성 첫 경기가 3월 30일 동대문에서 청룡과의 개막전이었는데 여기서 4:8로 패배하며
 
OB의 서울 첫 홈경기 승리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이광은이 4월 28일 해태와의 광주 경기에서 프로야구 첫 삼중살을 친 주인공이 되었다.
 
김재박이 7월 27일 삼성과의 홈경기에서 구원투수로 등판하여 10회초를 막은 뒤,
 
타석에선 끝내기까지 쳐 결승타와 승리투수를 한 경기에서 경험했다.
 
 
김재박 - 골든글러브 유격수 부문(3년 연속), 최다 도루 1위(50개)
 
이광은 -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GG 2년 연속/84년은 3루수)

 

 

1985년 기록은보니 그당시에 군대 있었던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에 있어서 MBC청룡에

경기를 보았다면 매우 열받고 술꽤나 마셨겠내요 

프로야구 MBC청룡 기록들을 보면 좋지않은 내용들을 지금의 LG트윈스가 많이 내려 받은거 같습니다 

근성이 없어 뒷힘이 약하고 감독의 권한보다 프런트의 입김이 쌔서 좋은 선수 들 방출하고 그러니 1994년 

우승을 끝으로 28년동안 우승을 못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올해는 잘좀 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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